사춘기는 발팔로 버티는 계절
11월도 중순인데 반팔을 입고 축구하고 있다.
날씨는 점점 찬바람이 부는데, 나는 겹겹이 니트에 코트에 머플러까지 겹쳐 입었는데,
저 친구들은 대체 무슨 기운으로 살아가는 걸까.
물어보면 대답도 시원하다.
"선생님, 안 추워요."
근데 그 말 끝나는 순간, 그 애의 팔에 닭살이 파도처럼 일어나는 걸 나는 봤다.
아이가 말로는 세상 여유로운 척하면서도
손가락은 주머니 속에서 동상 걸린 사람처럼 꿈틀대는 걸 놓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이런 애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사춘기란 게 묘해서, 추워 죽겠는 건 괜찮아도 약해 보이는 건 참을 수 없는 나이다.
긴팔을 입는 순간 뭔가 지는 것 같고, 패딩을 입으면 어딘가 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다 쉬는 시간에 보면 어떠냐.
교실 천정 에어컨 난방기 바람이 닿는 한구석에 자리 잡고, 슬쩍 그 바람 앞에서 손 비비고 있다.
친구 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턱을 괴고 '난 원래 이런 사람' 표정을 장착한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다.
'쎄보이고 싶은 마음'이란 사실
"나 이제 좀 다르게 보이고 싶어요"라는 신호라는 걸 아니까.
큰일 나는 허세도 아니고, 세상 향한 작은 연습 같은 거다.
사실 사춘기 애들의 반팔은 패션이 아니라 자기 선언문이다.
"나 변하고 있어요."
"근데 너무 들키긴 싫어요."
"그래도 조금은 봐주세요."
이 세 줄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반팔이 되는 거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사춘기 때 나도 괜히 점퍼 깃을 세웠으니까.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혼자 강인한 사람 코스프레를 했다.
추운 건 정말 싫었지만, 약해 보이는 건 더 싫은 나이였으니까.
지금 애들을 보며 어떤 기시감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다.
겨울이 다가온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데,
그때 반팔 아이들이 제일 큰 소리를 낸다.
"선생님! 공기순환은 필수예요!" 창문을 여는 순간,
나는 바로 얼음나라 마법에 걸린 NPC처럼 굳어버린다.
본인이 제일 춥게 입고 와놓고, 환기는 또 법처럼 지킨다.
그 친구들은 바람을 맞으며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곧 학부모님에게 톡이온다.
"선생님… 우리 애가 아침마다 반팔 입으려고 해서…
집에서 싸우고 있거든요. 선생님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톡 너머로 지친 한숨이 들렸다.
매일 아침 같은 전쟁을 벌이는 부모의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반팔로 겨울을 밀어붙이려는 꼬맹이들의 그 용감함이 귀여워지는 순간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교실 전체에 선포했다.
"자, 여기 한 가지 규칙 하나 추가다.
내일부터 반팔 입고 오는 아이는 실외체육 수업에 못 나간다!"
반팔 아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아이들은 모두 긴팔을 입고 나타났다.
부모님의 하루 종일의 설득도 못 한 일을,
선생님의 "실외체육 빠진다"는 한 마디가 해냈다.
묘하다.
부모님 말은 안 듣는데, 실외체육이 걸리면 먹혀간다.
사춘기 아이들의 반팔 선언은 사실 이렇게 시작된다.
어른 눈에는 황당한데, 본인에게는 어른 세계로 가는 비밀 의식 같은 것.
변해가는 건 존중한다.
그런데 요즘 반팔·반바지·선풍기 3종 세트가 한두 명씩 늘어나니,
늙은 선생님은 아침마다 약간 괴롭다.
나는 이해해보겠다. 너희들의 뜨거운마음. 변하고 싶은 욕망.
그래도 내 무릎은 시리다.
너희 변화는 응원하지만 감기까지 함께 응원할 생각은 없다.
사춘기는 반팔을 입고 시작되지만, 그 안에 있는 건 여름 같은 뜨거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