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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ngyouth May 31. 2019

좆됨의 파토스 (feat. 오즈 야스지로)

<남국재견>(1996)

말장난을 치려는 건 아니지만, <남국재견>은 다시 봄(재견)으로써 감상을 달리할 수 있었던 영화다.(한자어 '재견'은 실상 "짜이찌엔"이라는 작별인사다.) 대만의 현대사를 다루는 감독이기에,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이뤄진 대만의 사회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이 같은 지식의 부재가 영화를 보는 데 이해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달리 말하자면, 처음 <남국재견>을 보고 나서 나는 이 영화를 읽는 데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남국재견>의 몇 개의 이미지들은 강렬한 인상을 안기는 데 성공했다. 영화를 다시 보리라고 맘먹게 만든 것은 그 강렬한 이미지들이 파편화된 이미지가 결코 아닐 것이라는 확신 비슷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해 가능하도록 서사를 짜 맞추기 위해 서사 이외의 것들에는 눈독을 들이지 않았던 첫 번의 영화 감상 결과, 서사물로서 <남국재견>은 이해하기 어렵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 그러나 그 강렬하게 남았던 이미지 가령, 논두렁에 처박히는 자동차의 이미지로 끝이 나는 엔딩을 염두에 둔 채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영화는 처음서부터 그 처박힘의 엔딩 이미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듯한 에너지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또한, 논두렁에 처박히는 자동차 이미지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좆됨(fucked-up)의 감각은 영화 내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파토스로 <남국재견>을 감싸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좆됨'의 파토스를 기준 삼아 <남국재견>을 다시 봄으로써, 비로소 <남국재견>의 영화를 보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만한 감상이지만, 영화 <남국재견>은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그 '좆됨'의 파토스를 느껴가야 하는 영화다. <남국재견>이 포착하려는 것 역시 언어적인 구성물인 서사에 있다기보다는 감정적인 구성물인 정동에 맞춰진 것만 같다.


서사보다는 감정을 따라가는 것을 거창하게 독법(讀法)이라 칭한다면, 이와 비슷한 독법을 요하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물론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이 오즈의 영화에서 또렷하게 존재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감흥을 안기는 이유는 줄거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줄거리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내외면에서 피어나는 알듯 말듯한 정동에 있지 않은가. 곧 너무 많이 언급할 철학자-영화광은 오즈의 "단일한 쇼트-단일한 대사"가  "줄거리의 부재를 증언"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줄거리의 부재,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이 진행되는 오즈 영화 속 대화는 주제를 지닌 이야기로 응집되지는 않지만, 오히려 대화라는 음성 그 자체로 인해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이런 점 때문에 개인적으로 오즈의 영화는 서사를 모두 알고 난 뒤 다시 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거나 느껴지곤 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대한 이 같은 감상을 곧바로 허우샤오시엔의 <남국재견>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국재견> 역시 오즈의 영화를 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인물들의 내외면의 정동에 주목할 때 더 많은 것이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여전히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정동이란 것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정동이란 것에 어떻게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다시 오즈 영화 이야기. 오즈의 영화가 기승전결이 뚜렷하다고 말했지만, 오즈 영화의 감정선 혹은 정동이라는 것이 곧바로 이 기승전결을 따라 전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즈의 영화가 한편에는 "일상성"을 위치시키고, 다른 한 편에는 일상성과는 단절된, 마치 억압된 감정이 분출하고야 마는 "결정적 순간"이 위치한다는 폴 슈레이더의 설명보다 오히려 모든 순간이 "진부한 일상성"에 다름 아니라는 들뢰즈의 설명에 나는 더 공감하는 바다. <동경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류 치슈와 하라 세츠코가 마주 보는 그 장면에서 하라 세츠코의 격앙된 감정은 그전부터 쌓아온 어머니와 하라 세츠코와의 이야기들이 존재하기에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지, 일상적 순간과 동떨어진 채로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첨언하자면, 나는 처음 <동경이야기>를 보았을 때 그 장면이 상당히 어색했다. 왜 하라 세츠코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은 톤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즈의 영화에서 결혼식과 장례식과 같은 사건의 클라이맥스, 사건의 결정적 순간들은 비춰지지 않을뿐더러, 거기에 정동의 정점이 자리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그곳에 최대의 정동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배반됨으로써 오는 묘한 공허함이 오히려 그 자리를 채운다.  


사건의 클라이맥스와 정동의 분출이 평행하지 않다면, 오즈의 정동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단서는 너무 많이 언급되는 필로우 숏,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로서의 정물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들뢰즈는 오즈의 정물들로부터 "움직이는 것(시간)의 움직이지 않는 형태를 표상할 수 있는" 시간-이미지를 발견해냈고, 그것들은 시간을, 사유를 감각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현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들뢰즈의 이 설명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오즈 영화 속 뜬금없이 제시되는 정물들에게 이만한 해석을 부여하고 있는 들뢰즈의 설명은 충분히 흥미롭다. 정동은 인물이 겉으로 터뜨리는 울음이나 웃음을 통해 쉬이 잡힐만하나, 사실 그 울음과 웃음이 터지기 전까지 인물의 내면에서 스물스물 피어난다. 즉, 지속되는 일상성 속에서 정동은 글자 그대로 피어난다. 인물의 내면에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으나 그것은 보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진-이미지와 일견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와는 달리 오롯이 지속되는 시간만을 담아내고 있는 정물-이미지로부터 들뢰즈는 시간-이미지의 '사유'를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라 함은 곧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난 '정동'의 변화에 다름 아니다.   

   

<만춘> 속 꽃병(정물)


정동의 포착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금 길게 오즈를 경유해왔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영화 <남국재견>의 정동이라는 것은 인물들이 수행하는 움직임(운동)과 밀착되어 있다. 좀 더 애매하게 말하자면, <남국재견>의 정동은 영화가 수행하는 움직임(운동)과 밀착되어 있다. 영화 <남국재견>은 주인공 무리들이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뒤이어 제시되는 숏은 기차 자체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 숏이다. 영화는 기차 자체의 시점이 되어서 멀어지는 바깥의 풍경을 담아낸다. 이 풍경의 움직임에 꽤나 과도한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바깥의 풍경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곧 인물들이 수행하는 운동의 성질과 직결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주인공들은 중국으로 가 성공을 이루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만을 떠나지 못한다. 대만을 떠나려는 탈주라는 운동 감각과 인물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매는 정박의 감각이 <남국재견>을 휩싸고 있다. 서로 다른 성질의 이 운동 감각으로부터 <남국재견>의 줄거리가 형성된다. 재차 말하자면 <남국재견>은 줄거리로부터 운동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부터 줄거리가 형성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비단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호남호녀>(1995)를 만들고 난 뒤 "연기자들의 호흡이 좋아 세 사람의 움직임 자체를 영화로 찍어야겠다"라고 밝혔다.


탈주와 정박으로 인물들을 밀고 당기는 이 감각으로부터 인물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전진을 바라는 인물들은 전진의 움직임을 수행한다. 오프닝을 지나 다시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이들의 출발은 당연히 전진하는 운동-이미지로 제시되어야 한다. 카메라는 다시 기차의 시점이 되는데, 이때 기차는 터널을 지나 다가오는 풍경을 뚫듯이 앞으로 향해 나간다. 인물의 운동은 앞으로 다가오는 운동-이미지와 조응하며 나아간다. 그러나 영화가 담아내려는 것이 이들의 전진만이 아니기에, 곧이어 제시되는 줄거리는 출발을 저지하는 정박의 상황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은 돈문제로 개업이 미뤄짐으로써 저지된다. 동시에 빚을 지는 주인공이 등장함으로써 아직은 대만을 떠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이어진다. 정박의 상황은 곧 인물들을 정박된 집에 붙박아두는 것으로 비춰진다. '좆같은' 상황이 점점 드러나면서 '좆됨'의 파토스가 이들을 감싸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좆됨'의 파토스는 인물의 운동과 영화의 운동과 밀착되어 있다.


스물스물 좆같은 상황이 시작되고 있지만, 아직은 이들의 꿈을 접어버릴 정도는 되지 못한다. 아니, 이들은 탈주라는 꿈을 아직은 버리지 못했다. 인물은 다시 나아가려 한다. 승용차를 운전하며 전진해나가는 이미지가 끊임없이 제시되는데, 그런 중에 <남국재견>은 아주 특이한 장면을 선보인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초록색으로 필터링된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의뭉스러운 이 풍경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색안경을 낀 주인공이 안경을 올렸다 내리는 장면이 등장함으로써, 먼저의 초록색 풍경이 색안경을 낀 주인공의 시점으로 바라본 풍경임이 드러난다. 역시나 이 의뭉스러운 풍경에 대해서도 얼마간 과한 의미부여를 해보고 싶은데, 인물이 수행하는 전진의 운동과 영화 자체의 전진 운동이 조응하게 되는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 즉, 시점숏임이 드러나기 전에 그 풍경은 영화 자체의 운동으로 생각되었지만, 결국 그것이 인물의 운동으로 뒤늦게 밝혀짐으로써 영화 자체의 운동과 인물의 운동이 묘한 시차를 두고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중첩이라기보다는 정체를 달리 하는 것임이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차로 인해 이 장면은 잘도 모르지만 들뢰즈의 시간-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사유란 것을 작동시킨다. 


정체가 밝혀지기 전, 인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움직이는 세계를 포착하는 듯한 그 장면은 곧 들뢰즈의 세계-이미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역시나 잘 모르면서 꺼내 드는 세계-이미지의 개념적 설명을 조금 가져오자면, "주체가 어쩔 수 없는, 혹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운동을 세계가 자신의 취하는 것"이 바로 세계-이미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이 초록색 풍경이 들뢰즈를 떠올리게 한 것은 시차를 두고 사유의 틈을 벌려놓는 이미지 자체의 성격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국재견> 속 이 의뭉스러운 세계-풍경은 아피찻퐁 감독의 <찬란함의 무덤>(2015) 속 장면을 꼭 닮아 있다. <찬란함의 무덤>에서 수면병에 걸려 잠을 자는 군인들의 옆에는 저와 같이 빛을 내는 장치가 있다. 이것이 꿈을 꾸도록 도와내는 장치였는지, 단순한 형광등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세계의 풍경 자체가 저 장치의 빛을 따라 함께 변화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마 나는 저 풍경을 '세계가 꾸는 꿈(잠)'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빛의 변화라는 일종의 운동을 세계 자체가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는 점에서 이는 꿈-이미지와 세계-이미지의 사이에 걸쳐있다. 잠자는 어느 한 개인의 꿈도 아닌, 세계가 꾸고 있는 꿈만이 세계의 풍경을 저렇게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여전히 잘 모르겠다.


왼쪽 - <남국재견>. 가운데, 오른쪽 - <찬란함의 무덤>. 


잘 모르는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집어치우고 <남국재견>으로 다시 돌아와, 세계-이미지에 따라 <남국재견> 속 인물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상황이 점점 좆됨에 수렴될수록 그들에 의해서는 어쩌지 못하는 운동이 되어버리고 만다. 인물들의 탈주보다 그들을 붙들어 매려는 정박의 상황이 점점 더 커져감에 따라 이제 인물들은 스스로 움직인다기보다는 그들을 감싸는 세계와 풍경의 움직임에 의해 끌려다니게 된다. 좆같은 상황은 끊이지 않고, 이들의 '좆됨'은 인물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나-관객에게까지 그 '좆됨'이 전염되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간에 자리한 오토바이 시퀀스는 언뜻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담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오토바이 위 주인공들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트래킹 숏을 통해 이들의 운동을 잡아내고 있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함(aka. 좆됨)이다. 이들은 그 어떤 순간보다 빠르게 내달리고 있지만, 이 도로의 목적지는 그들이 도달해야 하는 중국이 아니다. 오토바이를 탄 채로 진행되는 질주는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야 할 트랙(도로) 위에 있다. 즉, 이 오토바이 시퀀스는 쳇바퀴 위에서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운동 장면에 다름 아니다. 질주 다음에 이어지는 상황은 좆됨의 궁극이다.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하고, 가족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종국에 주인공은 두드려 얻어맞아 신체를 구속당하기까지 한다.


탈주는 결국 실패하고 말까. 어쩌고 저쩌고의 상황을 거친 뒤에 주인공은 구속에서 풀려난다. 풀려난 주인공을 맞이하며 이들 세 명의 인물들은 다시금 운전대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차키는 어둠 속 논두렁에 던져진다. 각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이들은 한밤중에 차키를 찾기 위해 손전등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어둠을 비춘다. 이들이 놓인 이 좆같은 상황은 이 장면으로 한 방에 정리된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빛에만 의존한 채로 자동차를 시동 걸 차키를 찾는 이 형국이야말로 상투적이지만 그들의 현재 상황에 딱 들어맞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어쩌고 저째서 결국 차키를 찾아내고야 말지만. 이제 궁극의 좆됨이 가득 차 있는 영화는, 그래서 이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려 하지만 계속 붙들어 매고야 마는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이들의 끊임없는 탈주를 기어코 중단시켜 버리는 데에 이른다. 어둠 속에서 차키를 찾은 주인공들은 어둠 속에서 운전해 나간다. 그러다 주인공들을 태운 자동차는 논두렁에 처박히고 만다. 논두렁에 처박힌 차는 후진을 해서라도 이를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 인물의 운동이 중단되는 것은 정박을 기어코 안기려는 세계 탓이다. 인물들의 탈주는 처박혀버린 자동차와 함께 실패로 끝이 난다. 좆됨의 궁극기. 


그러나, 세계가 수행해내는 운동이 인물의 운동을 완전히 가로막았지만 여전히 인물은 탈주의 꿈을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처박힌 차로부터 운전대 위의 주인공이 빠져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차에서 빠져나온 주인공이 옆 좌석의 다른 주인공을 위해 문을 여는 것으로 끝이 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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