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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Feb 22. 2024

[나답게 엄마 노릇] 아이의 영혼을 일깨워라.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보살핌이란?

부모에게 없으면 안 되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

‘사랑?’ 사랑보다 더 근본적이며 부모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순수함이다. 순수함이야말로 사랑의 근원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순진함이나 천진난만함이 아닌  세상을 향해 투명하게 열려있는 깊은 영적 지혜에서 형성되는 태도를 말한다.
자녀를 기르는 데 있어서 ‘순수함’이란, 부모가 아이들을 이끌어줄 수는 있지만 조종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 부모는 아이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한 사람, 자신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그 한 사람에게 완전히 열려 있어야만 한다.
언뜻 보기에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이 제멋대로이고 매우 비효율적인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들이 알아낸 교훈이 가장 값진 것이라고 자부하며  아이에게 그 교훈을 주입하고 싶어 한다. 자녀를 불필요한 삶의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관찰해 보면, 대부분의 인생은 표면적인 삶에 불과하며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영적 탐구’의 여행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부모는 한 가정의 권위적인 존재가 아니다. 부모와 자녀는 동등한 영혼으로, 모두 자신의 내면적인 성숙을 위한 여행길에 오른 구도자일 뿐이다. 유일한 차이는 당신이 택한 ‘부모’라는 역할에 있다. 모든 영혼은 불멸의 존재다. 영혼은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지만, 우리는 놀이에서 역할을 임시로 선택할 수는 있다.
역할놀이를 벗어나면 부모와 자녀는 모두 동등한 하나의 순수한 영혼일 뿐이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이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우리 안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양치를 할 때 입을 좀 더 크게 벌려주었으면, 옷을 입을 때도 바지 구멍을 뚫어져라 보며 두 발을 쏙쏙 넣어주었으면, 어지른 장난감은 스스로 정리해 주었으면, 앉은자리에서 신명 나게 밥을 먹어주었으면, 두 번 세 번 네 번 그나마 잔잔하게 말할 때 들어주었으면. 심지어 설거지가 급할 때나 산책을 나갈 때나 갓난아기를 등에 둘러메고 움직이는 것 또한 모두 통제가 아닌가. 아이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부모는 편해진다. 머리로는 안다. 통제해선 안된다는 것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어서,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이것만 도와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에 우리 부모는 자꾸만 규율과 규칙을 정하고, 경고, 협박, 재촉을 일삼는가 하면 조건부 보상으로 아이들의 마음까지 통제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진정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 자신이기도 하다.

강한 척하며 약점을 감추는 법, 규칙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처벌을 안 받는 법,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가면을 쓰는 법에 능숙해져 가며 부모 스스로 영혼의 순수성을 파괴한다면, 그 모습을 보며 자라는 자녀의 영적 순수성도 저절로 훼손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탄생에서부터 유년기, 아동기, 사춘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다시금 경험하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면서 순수한 동심이 부활하는 축복을 맛보기도 한다. 그것은 부모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부모 노릇은 원래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도 덩달아 ‘마음의 키’가 자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100여 일이 지나고,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26년 전, 연락이 끊어진 부친의 소식을 듣고서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과거로 소환됐다. 수많은 역할을 등에 지고도 도무지 현재에 집중할 수 없던 나는 어둠 속을 헤맸다. 어둠의 시작은 내가 인간의 몸을 입고, 자식이라는 역할을 택하여 태어나려던 그 순간에 가닿았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태아를 보며 안아주는 것으로부터 치유는 시작됐다.

아이의 탄생은 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살아온 시간을 다시 훑고 지나며 틈새마다 작고 여린,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만났다.

‘아직도 거기에 있었구나, 조금 더 서두르지 않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가만히 바라본다. 가만히 들어준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내 안의 아이를 보고 들어주던 시간.

구도자란 어디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던 아이가 신의 사랑을 바라게 되고,
장난감을 소망하던 아이가 무한한 창조성을 원하게 된다면
그 아이가 바로 구도자다.




뿌리 속까지 깊게, 잘못 박혀있던 신념의 길을 새로이 트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나 자신에 대해.

성장하기 위해, 알아차리기 위해, 깨달음을 위해, 내려놓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위한 성장일까? 무엇을 위한 깨달음이지?’

모든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자기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내 영혼이 얼어있다면 영혼부터 깨워야 함을, 의식과 더불어 영적 성장 또한 피할 수 없음을 배웠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이 부재했다.

돌이켜보면 어둠 속에서 던졌던 질문,

‘나는 왜 태어났을까?’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답을 만났다. ‘안내자’

내게 주어진 답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내 몸을 빌어 찾아온 이 아이들의 영성이 다치지 않도록,

일깨워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아이가 자기 내면을 여행하고 목적의식을 자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부모의 역할을 맡기로 한 건 나의 선택이니까.

부모로서의 책임 또한 내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1. 넌 뭐든지 할 수 있단다
2. 무언가를 바란다면, 먼저 그걸 베풀어봐
3. 네가 지금 내리는 선택에 따라 네 미래가 달라진다
4. 거부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 보렴
5. 뭔가를 바라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소망의 씨앗’을 심는 일이란다
6. 삶을 여행하듯이 즐기렴
7.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뭔가 이유가 있어 서란다.

아이의 영성 이전에 내 영혼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모든 여정은 나를 이곳으로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음 또한 알아차린다.

저자는 일곱 가지 영적 법칙은 부모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저 말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아니라, 부모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자녀를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라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 나는 서른다섯 해에 걸친 여정이었지만, 아이들은 숫자를 배우고 한글을 깨우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의 목적을 찾아가고 알아차리는 과정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으로 남은 내 자신과 아이들의 여정을 안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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