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맞은편, 150년 숨겨진 여인의 비극

by M plus Paris

에펠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트로카데로(Trocadéro) 광장일 것입니다. 많은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소위 '인생 샷'을 남기곤 하죠. 하지만 화려한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로 옆 건물, '인류 박물관(Musée de l’Homme)'의 차가운 벽 안에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기록이 박제된 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주인공은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가혹한 별명으로 불렸던 여인, 사르키 바트만입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벨 에포크(Belle Époque, 19세기 말~20세기 초 파리가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아름다운 시절)'의 이면에 감춰진 차가운 '가짜 과학'의 폭력, 그리고 그녀가 온전한 한 인간으로 고향에 돌아가기까지 걸린 187년의 긴 여정을 파리지앵의 시선으로 추적해 봅니다.


I. 남아프리카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노예로


이야기는 178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부 케이프 주(Eastern Cape)의 평화로운 들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코이코이족(Khoikhoi)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사오이(Saoué)'였습니다. '코이코이'란 그들의 언어로 '사람 중의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네덜란드 식민 지배자들은 그들의 언어가 마치 말을 더듬는 것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호텐토트(Hottentot,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뜻의 비속어)'라는 멸칭을 붙여 그들의 존재를 격하시켰습니다.


Sawtche_dite_Sarah_Saartjie_Baartman_%C3%A9tudi%C3%A9e_comme_Femme_de_race_B%C3%B4chismann_.jpg?type=w1 Sawtche (Sarah Saartjie Baartman), Femme de race Bôchismann


어린 사오이는 식민 지배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잃고 케이프타운의 한 농가로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사르키(Saartjie)'라는 네덜란드식 이름을 얻게 되죠. 그녀는 코이코이족 여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아토피기아(Stéatopygie, 둔부 지방축적증)'라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양분을 엉덩이에 저장하는 인류학적 진화의 산물이었으나,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저 '돈이 되는 기이한 구경거리'로 비쳤을 뿐입니다.


II. 런던의 '구경거리'가 된 비너스


1810년, 사르키는 영국인 상인과 네덜란드 의사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배에 오르게 됩니다. "유럽에 가면 큰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라는 거짓 약속은 그녀를 런던의 차가운 무대 위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녀는 '호텐토트 비너스(L'Hottentote Vénu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런던 피카딜리의 서커스장과 귀족들의 살롱에서 구경거리로 전시되었습니다.


Venus-Hottentote.jpg?type=w1 Photos from Saartjie Baartman : le tragique destin de la 'Vénus Hottentote'


당시 런던 시민들은 입장료를 내고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이 그녀의 신체를 관찰하고, 심지어는 만지기까지 하는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인권 유린이었고, 영국의 '아프리카인 보호 협회(African Association)'는 이를 문제 삼아 법정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최 측은 그녀와 맺은 '자발적 계약서'를 증거로 내밀며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갔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강요된 계약이 '자유 의지(Liberté, 리베르테)'로 둔갑한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III. 프랑스, 과학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폭력


비극의 무대는 1814년 파리로 옮겨집니다. 파리의 동물 조련사에게 팔려 온 사르키는 런던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지성계의 거두이자 저명한 자연과학자였던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는 그녀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Georges Cuvier paleontology lecture engraving by Albert Chéreau (19th c.),


퀴비에는 사르키를 관찰한 뒤, 그녀를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규정하며 인종 계급 이론을 정당화했습니다. 그에게 그녀는 존엄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백인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표본'에 불과했습니다. 타국에서의 고독과 쏟아지는 조롱 속에서 그녀는 알코올에 의지하며 버텼으나, 결국 1815년 크리스마스 무렵, 불과 26세의 나이로 파리의 차가운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사인은 폐렴과 매독 등으로 추정되지만, 사실상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거대한 차별의 벽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상원(Sénat) 기록과 학술 자료들에 따르면, 그녀의 파리 생활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매춘(Prostitution)'으로 이어졌음이 언급됩니다. 이는 제국주의가 한 여성의 신체를 어떻게 마지막까지 착취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IV. 사후에도 멈추지 않은 모욕 (150년의 전시)


하지만 죽음조차 그녀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숨을 거두자마자 조르주 퀴비에는 시신을 해부했습니다. 그녀의 뇌와 성기는 병에 담겨 보관되었고, 뼈는 골격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신체를 본뜬 석고 모형까지 제작되었죠.


이 잔인한 전시물들은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 그리고 이후 인류 박물관(Musée de l’Homme)으로 옮겨져 무려 1974년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진보를 자부하던 파리의 심장부에서, 한 여성의 슬픔은 150년이 넘도록 '인류학적 자료'라는 명목하에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서구 근대성이 가진 야만성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자, 프랑스 지성사가 직면해야 했던 가장 부끄러운 얼룩이었습니다.



if-sara_809.jpg Photos from "Saartjie Baartman: le tragique destin de la 'Vénus Hottentote


V. 넬슨 만델라의 요청과 고향으로의 귀환


변화의 물결은 1994년, 인종차별 철폐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 사르키 바트만의 유해를 반환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초기 프랑스 정부는 그간 다른 나라의 문화재 반환 요청에 대응하듯 "국가 소유의 박물관 소장품은 양도가 불가능하다"라는 법적 논리를 내세워 거부했습니다.


kj9x23gy625byw2onlneabm6fvdt1kxhsswor4sobnalrgquax1uffxuk7mrhfr3.jpg Photos from "Saartjie Baartman: le tragique destin de la 'Vénus Hottentote


하지만 전 세계적인 인권 단체들의 압박과 프랑스 내부의 자성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2002년, 프랑스 의회(Assemblée nationale)는 오직 사르키 바트만을 위한 특별법(Loi nº 2002-323)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국가 자산으로 묶여있던 그녀의 유해를 남아공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예외적인 조치였습니다.


2002년 5월, 그녀는 마침내 파리를 떠나 고향 땅으로 향했습니다. 사망한 지 187년 만에 이루어진 귀환이었습니다. 그해 8월 9일, '남아공 여성의 날'에 그녀는 고향 가모스(Khambas)의 언덕 위에 국가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에 든다"라는 문구와 함께 그녀는 비로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South_Africa-Hankey-Sarah_Baartmans_grave.jpg Photos from "Saartjie Baartman: le tragique destin de la 'Vénus Hottentote',"


파리지앵의 시선 : '유형적 인류학'의 종언과 현대 문명의 성찰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한 일대기를 넘어, 서구 근대 과학이 어떻게 인종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당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텍스트입니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했던 '유형적 인류학(Anthropologie typologique, 인간의 신체 특징을 유형별로 나누어 우열을 가리던 학문)'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특별법까지 제정하며 유해를 반환한 것은, 과거의 과오에 대한 단순한 사과를 넘어 이러한 '차별의 과학'과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오늘날 파리의 인류 박물관이 인종이라는 개념 대신 '인류의 보편성'과 '개별적 존엄'을 강조하는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변화입니다.


우리가 사르키 바트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타자를 '구경거리'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순간, 우리 안의 인간성 역시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187년이라는 시간은 한 인간이 '물건'에서 '사람'으로 인정받기까지 걸린 잔인한 인내의 시간이었으며, 그녀가 누워있는 가모스 언덕의 바람은 이제 우리에게 "다시는 이런 야만을 반복하지 말라"는 무거운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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