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빚어낸 예술과 인생

by M plus Paris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화가들의 캔버스 뒤에는, 처절하고 차가운 현실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청년들의 고통이 서려 있습니다. 그 고난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지갑과 작업실, 그리고 우정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한 남자가 있었죠. 바로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신의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입니다. 그는 인상주의라는 거대한 파도가 치기 직전, 그 물결을 예견하고 스스로 방파제가 되어주었던 인상주의의 가장 헌신적인 우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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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de Frédéric Bazille par Étienne Carjat (1865) 자화상, 1865–1866년, 시카고 미술관



몽펠리에의 풍요로운 토양, 의학 대신 빛을 선택한 청년



이야기는 1841년 12월,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남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지유는 그곳에서 아주 부유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 은행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가스통 바지유는 광활한 비뇨블(Vignoble, 포도원)과 대토지, 그리고 은행을 소유한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개신교 특유의 근면과 절제, 그리고 수준 높은 문화적 교양을 동시에 중시했습니다. 부모님은 당연히 아들이 안정적인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고, 효심 깊은 바지유는 1862년 부모님의 뜻에 따라 파리 의대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해부학 강의실보다는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들, 그리고 이름 없는 화가들이 북적이는 아틀리에를 향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을 뒤흔들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됩니다. 바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라는 이른바 '인상주의 4인방'의 결성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의대 시험에서 낙제한 뒤 부모님께 당당히 선언합니다.


저는 의사 대신 화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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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beca4c-9d56-44f7-bd9d-5aa46f3e66a0_Louvre+hero.jpeg 미술 수업 장면


가난한 천재들의 안식처가 된 아틀리에


바지유는 친구들 사이에서 '키 크고 말수 적은 다정한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그의 정체성은 친구들의 경제적 구원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부유한 부모님으로부터 매달 고정적인 용돈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웬만한 왕실 연금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바지유는 그 풍요를 결코 혼자 누리지 않았습니다. 1866년경, 파리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굶주리던 모네와 르누아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rue Visconti, rue de la Condamine)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1867년 바지유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친구들을 향한 깊은 애정과 유머가 섞인 문장이 등장합니다.



모네가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멋진 캔버스를 한 묶음 들고 왔어요.
르누아르까지 합하면 제가 떠맡은 쫄딱 망한 화가가 둘이나 되는 셈입니다.
여기 완전히 빈털터리 화가들을 위한 구호소가 되었네요.



바지유의 아틀리에는 단순한 작업실이 아니라, 가난한 천재들의 '예술적 셰어하우스'이자 '정신적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그림을 일부러 비싼 값에 사주며 자존심을 지켜주었고, 집세를 대신 내주며 그들이 예술의 끈을 놓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습니다.


Pierre-Auguste Renoir, Alfred Sisley, Frederic Bazille
960px-Bazille_Sutdio_in_the_rue_de_Furstenberg.jpg?type=w773 퓌르스텐베르크 거리의 작업실, 1865,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인물과 풍경의 조화: 바지유가 개척한 인상주의의 원형



많은 이들이 바지유를 '후원자'로만 기억하지만, 화가로서 그의 역량은 당대 누구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특징은 야외의 자연광 아래 인물을 배치하는 '외광파(Plein air)'적 접근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가족 모임(La Réunion de famille, 1867)〉을 살펴보면 그 정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몽펠리에 근교의 여름 저택 테라스에 모인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현대의 고화질 사진처럼 선명하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가 형태를 무너뜨리며 빛의 잔상을 쫓았다면, 바지유는 형태의 견고함을 유지하면서도 빛의 투명함을 담아내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화단에서 드물게 흑인 모델을 주인공으로 세운 〈검은 드레스(Négresse aux pivoines)〉를 그리는 등, 계급과 인종에 편견 없는 진보적인 시선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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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풍경, 1869, 포그 미술관,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 어린 정원사 (The Little Gardener), 약 1866–67년, 휴스턴 미술관
1280px-Frédéric_Bazille_001.jpg 가족 재회 (1867) (Réunion de famille)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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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전경 (View of the Village), 1868년, 그물로 잡는 어부, 1868
Bazille,_Frédéric_~_La_Toilette,_1869-70,_Oil_on_canvas_Musee_Fabre,_Montpelier.jpg 라 투알레트 (단장 / 화장) (1869–1870), 몽펠리에(Montpellier), 파브르 미술관(Musée Fabre)


작품 속에 새겨진 '우리'라는 이름의 선언: 〈바지유의 아틀리에〉



바지유의 짧은 생애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물은 1870년에 그려진 〈바지유의 아틀리에(Atelier de Bazille)〉입니다. 오르세 미술관의 보물인 이 그림은 인상주의 운동의 초창기 모습을 담은 '집단 초상화'입니다.


넓고 쾌적한 아틀리에 한가운데에는 키가 큰 바지유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와 에밀 졸라(Émile Zola)가 그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그림 속 바지유의 모습은 본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인 마네가 그려준 것이라는 점입니다. 친구에 대한 존경과 우정이 캔버스 위에서 합쳐진 것이죠.


더욱 감동적인 점은 벽에 걸린 그림들입니다. 당시 보수적인 살롱(Salon)에서 거절당했던 친구들의 작품들을 바지유는 자신의 그림 속에 버젓이 그려 넣었습니다. 이는 아카데미의 권위에 대한 조용한 반항이자, "우리는 비록 거절당했지만 함께 연대하여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강력한 예술적 동맹의 선언이었습니다.


1280px-Fr%C3%A9d%C3%A9ric_Bazille_-_Bazille%27s_Studio_-_Google_Art_Project.jpg?type=w773 바지유의 작업실, 1870년,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바지유는 이젤 옆에서 팔레트를 들고 있으며, 이젤 앞의 붉은 수염 인물은 에두아르 마네이다.
imressionism.jpg?v=1735750959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폴 세잔, 에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



비극적인 전사



바지유의 운명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Guerre franco-prussienne)이 발발하며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던 그는 대리인을 세우거나 돈을 내고 병역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대한 헌신과 개신교적 책임감(Noblesse Oblige)으로 즈아브(Zouaves) 연대에 자원 입대합니다.


1870년 11월 27일, 하사관으로 승진한 날 동료들이 건네는 축하 잔을 받으며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11월 28일, 보른-라롤랑드(Beaune-la-Rolande) 전투에서 그는 부상당한 중대장을 대신해 직접 돌격을 이끌었습니다.


그 긴박한 사선 위에서도 바지유의 용기있는 인도주의는 빛났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 와중에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농가로 뛰어가는 것을 본 그는 소리쳤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절대 쏘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외침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가슴에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스물여덟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 인상주의의 첫 번째 전시회가 열리기 불과 몇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다운로드.jpeg Portrait présumé de Frédéric Bazille par Émile Defonds




파리지앵의 시선 - 돈이 아닌 '믿음'을 투자한 진정한 후원자



프랑스 사회에서 '빠트리무안(Patrimoine, 유산)'은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정신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바지유가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단순한 용돈이나 작업실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재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만약 바지유가 살아남았다면 인상주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와 함께 인상주의의 든든한 재정적 지주이자, 가장 세련된 풍경 인물화를 그리는 거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의 부재는 인상주의가 겪은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희생은 남겨진 동료들이 더욱 끈끈하게 뭉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인문학적 교훈을 얻습니다. 한 시대를 바꾸는 위대한 혁명은 천재 한 명의 독주가 아니라, 그 천재가 굶주리지 않도록 빵을 건네고 곁을 지켜준 '따뜻한 연대'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바지유의 아버지는 전장으로 달려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몽펠리에의 개신교 묘지에 안장했습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지켰던 모네와 르누아르는 훗날 세상을 뒤흔드는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린 찬란한 빛의 그림들 속에는 바지유가 건넸던 따뜻한 수프의 온기와 아틀리에의 온기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인상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찬란하고도 슬픈 서곡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조국에 바쳤고, 자신의 청춘을 친구들의 예술에 바쳤습니다. 오늘날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한다면, 화려한 색채 너머에 숨겨진 그 숭고한 우정과 책임감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bazille face_0.jpg 몽펠리에의 생 라자르(Saint-Lazare) 묘지에 위치한 바지유의 가족 묘역으로, 그의 흉상과 추모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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