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프랑스 예산 5년 치를쏟아부은 도박

Haussmann의 파리 대개조

by M plus Paris

우리가 사랑하는 파리의 풍경을 떠올려보세요. 널찍하게 뻗은 대로(Boulevards), 베이지 빛 석조 건물의 우아한 질서,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고풍스러운 가로등까지. 프랑스 화가 장 베로(Jean Béraud)의 1889년 작 <카퓌신 거리>를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19세기 마차를 자동차로, 인물들의 드레스와 실크햇을 현대의 코트로 바꾸기만 하면 오늘날의 구글 스트리트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죠.


하지만 이 눈부신 '근대성(Modernité)'의 이면에는 거대한 파괴와 눈물, 그리고 철저하게 계산된 통제의 서사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도시의 표준이 된 파리는 사실 중세의 낡은 허물을 잔인하게 벗겨내고 세워진 '기획된 신도시'였습니다. 파리의 화려한 겉면 아래 흐르는 차가운 행정의 메스와 소외된 이들의 피울음을 아카이빙해 봅니다.


I. 황제의 색연필과 행정 불도저의 조우


이야기는 1853년 여름, 튀일리 궁전의 한 집무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는 영국 망명 시절 보았던 런던의 쾌적한 풍경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를 런던보다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고 지도 위에 파란색, 빨간색 색연필로 파리의 새로운 혈관을 직접 그렸지요.


이 무모해 보이는 도면을 실현하기 위해 황제가 선택한 인물은 건축가가 아닌 법과 행정을 전공한 관료,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남작이었습니다. 수천 건의 토지 수용과 천문학적 자금 조달, 그리고 반대 세력의 저항을 뚫기 위해서는 예술적 감각보다 저돌적인 행정 불도저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스만은 황제의 야망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법적 맹점을 파고들며 도시를 통째로 '뚫기' 시작했습니다.


RV_35045-11.jpg?type=w3840 Adolphe Yvon, Napoleon III handing Baron Haussmann the decree for the annexation of the surrounding


II. 순환과 위생: 보이지 않는 혁명


오스만은 순환(Circulation)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했습니다. 공기가 흐르고, 사람이 흐르며, 무엇보다 자본이 흐르게 해야 한다는 확신이었지요. 19세기 중반 파리는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오스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를 남북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중심축, 즉 대 교차로(Grande Croisée)를 설계합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은 단순히 지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외젠 벨그랑(Eugène Belgrand)과 손을 잡고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하수도(Les Égouts)를 건설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저수조를 만들었습니다. 파리가 낭만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지독한 악취를 지하로 밀어 넣은 이 결벽증적 행정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오스만은 도시에 숨구멍을 뚫었습니다. 아돌프 알팡(Adolphe Alphand)을 기용해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과 뱅센 숲(Bois de Vincennes)을 조성하고, 동네마다 작은 공원과 광장을 배치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에게 공기를 선물하겠다는 황제의 약속이 구체적인 공간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Egouts_2.jpg?type=w3840 Source: Underground galleries of the Musée des Égouts de Paris (Paris Sewer Museum)


III. 통제와 미학의 기묘한 동거: 거리의 UI를 설계하다


오스만은 단순히 길을 넓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길 위를 채우는 모든 요소를 하나의 브랜드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가브리엘 다비우(Gabriel Davioud)를 가로 시설물 (Mobilier urbain) 전담 설계자로 임명했습니다. 다비우는 오스만의 철학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여 파리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1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파리의 거리 어디에서나 다비우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설계한 가로 시설물 (Mobilier urbain) 들은 박물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파리지앵의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의 유산'입니다.


Jean Béraud, The Morris Column (La Colonne Morris), c. 1885, Musée Carnavalet, Paris.

① 모리스 광고탑 (Colonne Morris)


1868년 도입된 이 원통형 기둥은 당시 난잡하게 붙어있던 공연 포스터들을 정리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짙은 초록색 주물과 화려한 돔 장식은 오스만 양식의 석조 건물들과 완벽한 시각적 조화를 이루도록 규격화되었습니다















Paris, c. 1930, Roger-Viollet / Paris Musées.

② 파란색과 초록색의 조화: 벤치와 가로등


파리 거리의 벤치(Banc public)는 항상 같은 '파리 그린(Vert wagon)' 색상입니다. 가로등(Réverbère)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로의 폭과 건물의 높이에 따라 가로등의 기둥 높이와 문양까지 세밀하게 규격화하여,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조명 시스템 아래 놓이게 했습니다.




Wallace Fountain (Fontaine Wallace)

③ 워레스 분수 (Fontaines Wallace)


오스만화가 진행되던 시기, 파리 시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이 분수는 디자인 표준화의 정점입니다. 영국의 자선가 리처드 워레스가 기부하여 만들어진 이 분수는 네 명의 여신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우아한 주철 디자인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단순히 물을 마시는 곳을 넘어, 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예술적 랜드마크로서 파리의 '시각적 UI'를 완성했습니다.





④ 키오스크와 나무 그릴 (Grille d'arbre)


신문을 파는 키오스크의 지붕 모양부터 가로수 뿌리를 보호하는 철제 그릴의 무늬까지 모두 다비우의 도면을 따랐습니다. 이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보행자로 하여금 '내가 지금 파리라는 특별한 공간에 있다'는 브랜드 경험을 극대화했습니다.



IV. 화려한 대로 뒤에 숨겨진 공포의 정치학


하지만 이 화려한 미학 이면에는 차가운 통치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도로 폭을 무려 120미터까지 넓히라고 주문했던 진정한 이유는 '혁명의 차단'이었습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시민들이 바리케이드(Barricade)를 치고 정부군에 맞서기에 최적의 장소였지만, 직선으로 뻗은 광대한 대로는 군대의 기동과 대포 발사를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두고 "오스만의 진정한 목적은 내란 발생 시 바리케이드 구축을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꿰뚫어 보았습니다. 도시의 근대화라는 명분 뒤에는 노동자 구역과 병영을 직선으로 연결해 잠재적 폭동을 물리적으로 제압하려는 통제의 심리학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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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창조적 파괴와 쫓겨난 사람들


이 위대한 개조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오스만은 프로젝트를 위해 프랑스 제국 연간 예산의 5배에 달하는 약 84억 프랑이라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끌어다 썼습니다. 훗날 '오스만의 환상적인 회계(Les Comptes fantastiques d'Haussmann)'라 비판받은 이 재정적 도박은 결국 그의 실각 원인이 됩니다.


더욱 뼈아픈 기록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판화 <철거로 인한 인구이동>에서 발견됩니다. '이삿짐(Déménagement)'을 실은 수레들이 줄을 지어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모습은, '도시 정화'라는 명목 아래 삶의 터전을 잃은 빈민들의 슬픔을 증언합니다. 오스만 양식(Immeuble de rapport)의 건물들이 들어서자 임대료는 폭등했고, 가난한 이들은 벨빌(Belleville) 같은 외곽(Banlieue)으로 밀려났습니다. 오늘날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이미 170년 전 파리에서 그 잔인한 원형을 완성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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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앵의 시선: 근대의 가면을 쓴 도시의 숙명


오스만 대개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진정한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인문학적 고찰입니다.


파리의 아름다운 일관성(Consistency)은 분명 브랜드 전략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리의 벤치 하나, 가로등의 문양 하나까지 통일시킨 다비우의 미학은 파리를 대체 불가능한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질서의 밑바닥에는 '통제'라는 권력의 의지와 '배제'라는 사회적 희생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이는 비단 19세기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60~80년대 서울의 판자촌 철거와 목동 개발 과정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서사를 목격합니다. '도시 재생'과 '환경 개선'이라는 고결한 명분 뒤에서, 누군가는 쓰레기차에 실려 쫓겨나고 누군가는 그 희생 위에 세워진 고급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향유했습니다. 결국 공공의 이익이라는 가면 뒤에는 자본의 논리가 번뜩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파리의 미학은 잔혹합니다. 그러나 그 파괴와 창조의 변증법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근대 도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스만의 파리를 보며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뿐만 아니라, 그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끝에서 밀려나야 했던 이들의 그림자까지 함께 읽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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