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다이닝에 대한 단상
지난 추석 교토여행 때 일본이 한국보다 대체적으로 식당 가격이 좀 더 합리적이라는 걸 깨닫고는, 이번 단풍 여행 때도 이왕이면 좋은 곳에 많이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여행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4일이라는 촉박한 일정에 단풍 명소를 다 방문하려고 하니 도저히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할 시간이 나질 않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곳에서의 식사"라 하면 예약이 되는, 코스로 나오는 파인다이닝이나 호텔 다이닝인데, 사실 이런 식사에는 최소 2시간-2시간 반은 족히 걸리고, 앞 일정이 밀리게 되면 식사 예약 시간을 못 맞추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사실 이 모든 것은 지난번 추석 때 경험했던 것들...) 덜컥 식당을 여러 군데 예약해 두기가 좀 꺼려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매일 적어도 한 개씩은 꼭 가야지, 했던 팬시한 다이닝들을 다 포기하고 딱 하루 저녁에 몰빵 하기로 한 후(그러니까 결국 계획은 매일 두 끼에서 한 끼, 그리고 하루 저녁으로 수렴되었다...) 엄청난 고민과 서치 끝에 요즘 교토에서 매우 핫하다는 미슐랭 1스타 Cenci라는 이탈리안 식당로 정했다. (국내에서 "첸치“로 찾으면 후기가 몇 개 나오는데, 이게 발음이 첸치가 맞는지 쎈씨가 맞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게다가 "Asia's 50 Best Restaurants"에 등극한 유일한 교토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참고로 이 리스트에는 모수, 밍글스, 온지음 등 한국 미슐랭 몇 개가 포함되어 있다) 마침 운 좋게 금요일 저녁에 한 자리를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내 성향 상 혼자 굳이 이 금액을 주고 (물론 그냥 일반 미슐랭 가격 수준이지만) 먹어야 하나 싶긴 했지만, 요즘 들어 특히 파인다이닝은 그 값만큼 만족도가 높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있었고(요즘 점점 먹는 낙이 줄어들고 있기에...), 기왕 여행 가는 거 일본 파인다이닝을 경험해보고 싶었기에. 무조건 가격과 맛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렴풋이 깨닫긴 했지만 아직 내가 이런 확답을 내리기에는 경험치가 많지는 않아서 더 경험을 늘리고 싶기도 했고.
예약 당일이 여행 3일째였는데, 여행 기간 내내 매일 오전 일찍부터 이동하고, 매번 제대로 된 식사는 오후 2시나 훌쩍 넘어서야 했고, 게다가 저녁은 늘 늦은 시간 웨이팅에 라멘 한 그릇 먹는 정도였기 때문인지, 사실 몸이 알게 모르게 너무 힘들고 지쳤었던 것 같다. 이 날도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카레+타마고샌드 집을 겨우 갔더니만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고(이틀 연속 실패했다... 제대로 공지도 안 띄운 것 같은데), 짜증이 매우 난 상태로 그래도 뭐는 먹어야 힘이 나겠다 싶어 교토역의 동양정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웨이팅이 덜했고 꽤 금방 들어갈 수 있었다. 동양정은 정말 나 빼고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는 함박스테이크 체인점 같았는데, 나는 함박스테이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고, 사진을 보니 지난번 내가 교토 방문했을 때 갔던 함박스테이크집이 훨씬 더 맛있어 보여서 원래 여기는 굳이 가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날 이미 너무 지쳐서 다른 곳 찾기도 귀찮았고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했다.
늦은 점심 식사를 하는 와중에, 원래 계획했던 우지를 갈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사실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 그냥 어느 카페나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우세하고 있었는데, Cenci 예약까지 3시간은 남았고, 우지는 교토역에서 금방 가고, 3시간이면 충분히 우지를 찍고 Cenci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먹었으면 움직여라, 닝겐이여!!!"라고 머릿속으로 한 열 번은 외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우지로 이동했다.
결국 우지를 잘 구경하고 교토역으로 다시 돌아와서, 서둘러 Cenci에 갈 준비를 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떨어졌고 하필 보조배터리 충전해 놓는 것도 깜빡해서... ㅠㅠ 부랴부랴 숙소에 돌아와서 급히 핸드폰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충전하고, 서둘러 Cenci로 이동했다.
사실 예약할 때 예약 페이지에서 자리 요청을 다 수용해 줄 수 없을 수도 있다,라는 문구는 어렴풋이 본 것 같긴 했는데, 내 예약은 어쨌든 테이블 자리로 해두었었다. 그 후에 이 예약 페이지를 들락날락해 보니 다른 일정에 테이블이 없는 경우는 바 자리 옵션만 있길래, 당연히 난 예약한 자리 대로 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편하게 밥 먹겠구나! 이제 좀 쉬자~"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동.
그런데 웬걸... 갔더니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있는 바 자리를 주는 게 아닌지? 그래서 난 테이블로 예약했다고 얘기하니, 나이 좀 있으신 여자 서버가 아 그러냐면서, 미안하지만 오늘 예약 만석이라며 아주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는 거다. (사실 미안한 기색 1도 안 느껴졌고, 오히려 나는 절. 대. 너의 그런 짜치는 컴플레인은 받아줄 수 없어,라는 전투적 의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후에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아, ‘스미마셍~' 이런 느낌이 아니었구나?"라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었다.) 자리에 착석 후 둘러보니 예상과 다르게 규모가 훨씬 큰 레스토랑이었고,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정말로 이미 만석이었고, 1인 손님은 나 하나였기 때문에 내가 이 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 (바 자리는 딱 4인석이었고, 나 말고 어느 일본인 부부 한 팀이 더 있었다), 사실 이 상황을 설명해 줄 때 "미슐랭" 식당에 기대하는 만큼의 서비스로 좀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좋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컸다. 아니면 차라리 그 예약 페이지에 우리가 이런 문구를 써놨다,라고 다시 설명이라도 해주던지. 그 문구가 있던 게 맞는지 내 기억이 긴가민가했으므로. (아니, 구글 후기에서는 이곳 접객이 정말 너무 친절하다는 칭찬이 많아서 접객에 대한 기대를 했던 것도 큰데, 진짜 이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첫인상이 이래놓고 나니 이미 식사 시작 전부터 사실 기분이 매우 별로였고... 기분 나쁘니 술은 시키지 말아야지라고 괜히 다짐했다. 애써 기분 좋게 식사에 임하려 노력해 봐도 그 서버의 냉정함이 계속 뇌리에서 거슬렸고 이미 상한 기분은 돌아올 기색이...
맨 처음 디쉬는 치킨 broth에 들어간 순무와 참붕어? 한입거리 생선요리였다(손으로 그냥 집어 먹는 거라고). 전반적으로 이 날 순무가 들어간 요리가 많았는데, 뭐 개인적으로 채소 매우 좋아하지만, 솔직히 순무 자체가 그렇게 맛있는 채소인지는 잘 모르겠더라... 식감이 좀 물컹하기도 하고. 수프는 너무 짰는데, 순무가 핵심이었으면 좀 치킨 broth처럼 짜고 강렬한 베이스보다는 좀 더 슴슴한 베이스를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저 치킨 broth의 짠맛이 너무 모든 것을 장악해 버렸다고나 할까... 생선은 맛있었다.
술은 안 시키려고 했는데, 담당 서버는 친절했고, 옆 일본인 아저씨도 와인을 시키시고, 둘러봐도 다 그렇고, 그래서 그래, 기왕 미슐랭까지 와서 먹는데 적어도 한잔은 시켜야지, 싶었고, 서버가 뭐라고 와인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 줄지도 궁금했고, 등등의 이유로 결국 화이트 와인 한잔 하나 추천받아 주문했다. 서버의 말로는 어느 커플이 생산하는 미국 와인인데, 본인은 미국 와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건 꽤 좋다며, 블라인드 테이스팅 했을 때 유럽 와인인 줄 알았다고. 처음 접해보는 그라나슈 화이트였다. (화이트라면 쇼블이나 샤도 정도만 주로 먹어봤기 때문...ㅎㅎ)
코스 시작 때 셰프님이 인사를 해주셨었고, 중간에 또 오셔서 "맛있어요?"라고 수줍게 한국말로 물어봐주셨다. (찾아보다 알게 된 사실인데, 수년 전 한국에서 현재 미슐랭 2스타인 알라프리마와 콜라보를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기대했던 메인인 사슴고기. 생각해 보니 사슴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 맛이 궁금했다. 막상 먹어보니 그냥 고기? 였다. 양고기처럼 뭔가 특색이 있는 건 아니고... 뭐랄까 좀 담백한 맛이었달까. 오히려 밑에 깔려있는 미소 소스가 굉장히 강렬하고 독특한 맛이었고, 고기 자체는 느끼하지도 않고(이틀 전 오리고기에 데인 나...) 뭐 특유의 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때깔 매우 좋고 잘 구워진 고기였다(내 표현의 한계...) 결국 막 "되게 맛있다!" 이런 맛은 아니었던 거 같다. 애써 여러 방식으로 한점 한점 먹으며 대단한 맛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기대보다는 좀 무난했다고 할까.
그리고 이때 즈음 서버가 추가메뉴인 리조또를 주문할 건지 물어보는데, 배도 부르고 굳이 안 먹어도 되겠다 싶어 미련 없이 패스… (옆 일본 아저씨는 드시던데, 추가로 또 먹기엔 양이 꽤 상당해 보였다.)
메인 다음으로 사쿠라에비와 또 순무(!!!)가 들어간, 이 식당에서 직접 만든 파스타면을 사용한 파스타가 나왔다. 다 필요 없고, 난 저 사쿠라에비에 꽂혔다... 색깔이 너무나도 예쁜 연분홍(핑크/베이비핑크라고 하면 뭔가 또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에 아주 작지도, 크지도 않고, 적당히 짭조름하고...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았던 재료. 파스타 전반적으로는 가볍게 먹기 딱 적당한 느낌이었다. 순무가 또 엄청 사용된 게 좀 놀라웠을 뿐... (순무 지옥...)
총 두 시간 반 정도 소요된 식사였다. 중간중간 나를 담당해 주던 서버가 친절하게도(?) 말을 계속 걸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곤 했는데 (뭐 뻔한 교토 방문 이유 등등), 나는 교토가 너무 도시 같지도 않고, 옛것과 모던함이 다 있어서 좋다고 했고, 이 서버도 자기는 원래 오사카 출신인데 그 도시의 복잡함보다 교토의 한적함이 좋아 이곳에 왔다고 한다. 문득 지난번 추석 교토에 방문했을 때 어느 호텔 1층 맥줏집 직원이 떠올랐다. 그 친구도 이 서버와 정확히 똑같은 말을 했었다. (교토는 도쿄/오사카와 다르게 그 고유의 고즈넉함이 있는데, 사실 이곳도 관광객 천지다...)
나오면서 나를 담당해 준 서버와 셰프님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주셨고, 서버가 무슨 디쉬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너무 순식간에 파스타와 마지막 디저트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나는 이런 대답을 적당히 둘러대거나 잘 포장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내 친구가 셰프님 마상 입은 거 아니냐며...) 식사 중에 옆자리 일본 아저씨는 "스고이~" 이러면서 드시던데, 솔직히 나는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는 못 느꼈고, 그냥 전반적으로 무난했던 거 같다.
흠... 그래서 20만원 넘게 지불하고 먹은 저녁에서 얼마나 만족감을 느꼈냐? 하면... 뭐 그냥 "경험해 봤다" 정도이고, 이 가격만큼 "되게 맛있다! 너무 행복했다!" 이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파인다이닝은 정말 무슨 특별한 날 기분을 내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대접하기 위해 오는 게 좋은 것 같고 그냥 일상에서는 굳이 찾아 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코스 중간에 먹다가 문득 든 생각 중 하나는, "아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거 진짜 일상적으로 먹을 텐데, 이런 미식을 비롯해서 웬만한 것들이 결국 나중에는 진짜 감흥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점점 더 격한 유흥이나 자극에 빠지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했다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미식도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기에 이런 걸 맨날 먹어도 너무 맛있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겠지.
그나저나 식사 후 한 가지 신기해던 점은 숙소로 돌아오니 피곤이 풀리고 갑자기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컨디션이 한결 좋아서 수월하게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게 지친 일정들 후에 처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식사를 해서인지, 아니면 좋은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는 "그냥 쉰 거야~~" 라며 비웃었지만ㅋㅋ). 그래도 기왕 거금 써서 혼자 파인다이닝 했으니 좋은 재료들로 만든 음식 먹어서 몸보신했다고 기분 좋게 생각하려 한다.
(이 식사 직후에는 굳이 이런 짓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음 여행에서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인다이닝에 대한 시도를 다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