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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진씨 Sep 05. 2022

돈이 좋아 밀수가 하고 싶어서

<옛날 신문 다시 읽기>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밀수 이야기

밀수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무려 36년간 이어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날이었다. 일본인은 떠났지만, 일본의 영향은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시인 김수영은 해방 후 시간이 꽤 지난 1961년에도 초고를 쓸 때 일본어로 썼다는 일화는 식민지의 유산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시 <중용에 대하여>의 한 구절인 "중용은 여기에 없다."를 "中庸ハココニハナイ"로 쓴 것이 그것이다.


생산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일본인 경영자들이 떠난 후, 조선의 기업가들이 그 생산을 이어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생산기술의 A부터 Z까지 다 알고 있었던 일본인 기술자들이 없어지자 생산이 어려워졌다. 또한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지고, 통행마저 자유로워지지 않자 더욱 어려워지던 시점이었다. 물품 공급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연스레 외제로 눈길이 갔다. 


그중에서도 일본 제품 수입이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반도와 거리가 가깝고, 물품도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산 물품을 가져오는 방법이었다.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반일 정서는 최고조였다. 아직 국민 정서상 일본제 물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아무도 몰래 들여오는 것이었다. 바로 밀수다. 들여오기만 하면 수요는 보장된다? 다른 말로 하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 가장 가까운 루트를 가진 부산항을 중심으로 밀수꾼들이 암암리에 활동을 시작했다.




밀수, 아니 민족반역자를 고발한다!

1949년 6월 3일 자와 4일 자 <조선일보> 신문 2면에는 점점 규모가 커지는 일본 제품 밀무역을 집중 취재한 기사가 실려있다. 제목은 「밀수 항도 부산을 찾아서」.  기자는 글을 상(上), 하(下) 편으로 나눴다. 상편에서는 밀수의 원인과 밀수에 가담한 사람을 분석, 하편에서는 밀수 품목과 기자의 생각을 실었다.


밀수 원인 분석은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일치하므로 생략하고, 바로 사람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기자는 밀수를 주도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분석했다. 

국내 생산력이 거의 0에 가까운 것을 눈치챈 재빠른 생안들은 기회를 노려 대일밀부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재일 귀환동포 중 나날이 쪼들리는 생활 난의 타개책 역시 이 길에 구한 것이니, 이것이 곧 1946년 하반기부터 나타난 일본과의 무역의 발단일 것이다.  … 나날이 굳어져 가는 삼팔선으로 인한 대 이북 밀교역의 부진에 (밀교역에) 솜씨 있는 상인들은 이북 장사를 집어치우고 수지가 맞는 일본 장사로 코-스를 전환한 것이니 


밀수가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자 다양한 사람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주도했다고 한다. 일본과의 연결이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북에서 물품을 들여온 경력이 있는 이북 출신 사업가들도 일본 제품 밀수에 뛰어들었다. 38선 왕래가 자유로워지지 않자 빠르게 노선을 전환한 것이다. 장사 눈목이 대단하다.


이렇게 나날이 발전하는 밀수에서 과연 어떤 품목을 교역했을까? 당시 분석에 따르면, 대표 수입품목으로는 화장품, 비단, 시계, 자동차 부품 등 사치품 위주였다. 반면, 일본으로 수출하는 품목은 휘발유, 생고무 등 생필품이 중심이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결국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많은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밀수를 단속하기 위해 특별반을 조직했으나, 조직 몇 개를 검거했을 뿐 밀수 자체를 뿌리 뽑지는 못했다.


이러한 현실에 기자는 연재 기사를 마무리하며 대일 밀무역을 이렇게 비판했다.

이러한 가형적 밀무역 행위로 인하여 국내 경제를 혼란케 하여 이 땅을 외국 시장화시키는 점에 비추어 당국의 긴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 여기에 우리 겨레는 이들의 재침략을 감지하는 의미에서라도 민족적 입장에서 일본 제품의 사용을 삼가야 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해방된 지 만 4년도 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또 어떻게 보면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기상천외한 밀수 방식들

이후 1960~70년대 밀수는 더욱 활력을 찾았다.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근절을 외쳤지만, 이미 커진 시장을 뿌리 뽑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특히 대재벌 삼성 이병철 회장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정부가 묵인한 사례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라 밀수의 대상과 품목도 더 다양해졌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으로 교역 상대가 증가했다. 사치품인 양복 옷감과 시계 등은 물론이고, TV와 같은 전자제품, 심지어 정력에 좋기로 소문난 녹용까지 밀수 대상이 아닌 것이 없었다. 세관과 경찰의 단속을 피해 수법 역시 다양해졌다. 초기에는 한국 국적의 선박이 안 보이는 곳에 숨겨서 직접 물품을 가져왔었다. 이후 이 수법에 대한 검문이 심해지자 여러 가지 꼼수를 개발했다.


(1) 해상 밀수특공대

특공대는 전술/전략적인 공격에 유능한 부대다. 빠른 시간 안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밀수특공대의 작전은 당연 밀수다. 빠르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속력이 빠른 배를 갖췄다. 또한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력까지 갖췄다. 해상에서는 물품을 안전하게 인계한 후, 검문팀이 다가오면 자폭을 해버 리거나, 검문팀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매우 폭력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너무 폭력적이었던 탓에 단속이 강화되어 1972년부터는 이러한 방식이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밀수선을 감시하는 당국의 감시선. 과연 재빠른 밀수특공대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을지 심히 걱정된다. <조선일보>


(2) 해녀특공대

선박으로 하는 밀수에 차질이 생기자 이제는 물품을 아예 바닷속 깊이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이를 조용히 인양하기 위해 해녀가 투입되었다. 특히 부산 영도구 일대에서 많이 목격되었다. 영도에는 1880년대부터 제주도 출신 선원과 해녀들이 자주 드나든 곳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화학 원료로 우뭇가사리가 주목받았는데, 직접 사람이 채취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해녀들이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도 영도에는 제주도 출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해녀들이 가진 장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었다. 앞바다에서 거래를 성사시킨 후 사람이 직접 물품을 배송하기 때문에 세관 검문도 딱히 필요 없었다. 이러한 장점을 내세워 1970년대 해녀특공대를 운영하는 조직도 생겨났다. 197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한 해녀특공대 조직은 1970년부터 7년을 운용해서 약 5억 원어치를 밀수했다고 밝혔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3) 해상박치기

밀수특공대와 해녀특공대는 모두 한국인이 물건을 가지고 오는 형식이었다. 계속되는 밀수에 정부 역시 한국인 선원에 대한 특별 단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인이 단속에 걸린다? 그러면 외국인을 쓰면 안 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밀수 조직은 일본인을 적극 이용했다. 국제전화를 통해 접선 장소와 품목을 정한다. 그러면 일본인이나 재일교포가 한국에서 대금을 받아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사서 들어온다. 혹은 일본 선박이 부산 앞바다까지 들어오면 고기 잡는 어선으로 위장한 밀수 선박과 접촉해 은밀히 작업을 진행한다. 어선은 단속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이 방식은 1990년대까지 살아남은 최고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일반 어선처럼 보이지만 해상박치기 작전에 동원된 밀무역 전용 위장 어선이다. <동아일보>




돈이 잘못했다

이렇게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상 밀수 작전은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항공기 운용이 보편화되는 1990년대까지 크게 성행하였고, 현재도 밀수는 진행 중이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나 <마약왕> 등에서는 조직폭력 단체를 중심으로 마약까지 밀수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만큼 대한민국 제1의 항구인 부산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밀수가 자행되어왔다. 


집게사장이 이 시기 부산에 살았더라면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모든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범죄 수법의 다양화를 만들어냈다. 이때나 오늘이나 역시 사람을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결국 돈이었다. 이 사회의 어른들이 "지금 사람들은 돈, 돈 이야기하며 너무 돈만 밝힌다."라고 핀잔 줄 일은 아닌듯하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돈의 흐름에 종속된 이러한 사회 풍조는 앞으로 더 할지도 모르겠다.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또 돈이 필요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찬란한 앞날을 위해서도 돈은 더 필요할 것이다.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충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돈에 눈이 먼 국가나 개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법을 통해 돈을 긁어모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만을 바라보고 자행하는 범죄인 밀수는 사라지기 어렵지 않을까. 사카린 밀수 사건처럼 국가는 또 밀수를 방관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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