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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개연성 Jun 21. 2020

까탁 무용수 누리

홍대와 합정 사이 골목, 살짝 보이는 입구를 올라가니 경쾌한 방울 소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 나중에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발목에 무수히 많은 방울을 달고 우아하고 경쾌하게 발을 움직이는 여자가 보였다. 그동안 보았던 어떤 춤과도 다른 느낌을 주는 우아한 손과 발 동작.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이 갔던 던 건 춤추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은 은은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누리라고 합니다. 까탁(Kathak) 무용수이자, 강사로서 사람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리'가 순우리말로는 ‘세상’이라는 뜻인데 아랍, 페르시아, 인도에서는 ‘빛’이라는 뜻이 있어요. 합치면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 되죠. 뜻이 맘에 들어서 필명으로 선택하여 계속 사용하고 있어요.



까탁이라는 다소 생소한 춤을 처음에 어떻게 접하셨나요?


대학교 다닐 때쯤 힘든 시절을 겪었어요. 거의 우울증이 있어서 학생 생활 상담소에서 일 년 가까이 상담을 받았죠. 우울증을 겪으면 감정적으로 우울한 것은 물론이고, 굉장히 무기력해져요. 그때 상담 선생님이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해보라며 추천해준 게 춤이었어요.


원래 아시아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는 아시아의 댄스를 접할 수 없어서 벨리댄스를 하러 갔어요. 십 년 전이 벨리댄스가 유행할 시점이었거든요. 그러다 2-3년 후 까탁이라는 인도의 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시 마침 인도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오신 마노자이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까탁에 입문하게 됐죠.


“까탁. 쉬바신에 기도. 터키 앙카라에서 남자친구가 찍어준 영상. 은사 마노자이 선생님께 전수받은 작품.”


선생님이 한국에 삼 년간 계셨는데, 그 삼 년 동안 거의 매일 가서 춤을 배웠어요. 당시 심리상담 대학원 다니고 있었는데 공부는 뒷전이고 춤추러 다녔어요(웃음). ‘춤에 미친 애’라며 뭐가 중요한지 모른다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결국 제가 이걸 직업으로 삼게 됐잖아요. 길게 보면 잘한 일이죠.



‘까탁’이라는 춤이 워낙 생소해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까탁의 어원은 ‘Katha’로, 이야기꾼이라는 뜻이에요. 옛날 중세 시대에 중인도와 북인도에서는 음유 시인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며 신의 이야기를 전했다고 해요. 그때는 책이 없으니 노래나 시는 물론 동작으로 이야기를 전했어요. 일종의 포크아트였고도 볼 수도 있겠네요.


그랬던 무용 예술이 중세 무굴왕조가 들어서면서 궁전으로 편입됐어요. 무굴의 왕족과 호족, 귀족들이 예술에 후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까탁 무용수는 더 이상 생계 수단을 걱정하지 않고 예술에 전념할 수 있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궁중 예술로 발전하면서 체계와 이론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다양한 요소가 생겨났어요. 기본 박자를 예로 들면 16박자만 있는 게 아니라 10박자, 14박자, 19박자, 7박자 등 다양한 리듬에 적용이 되었죠.


무굴왕조 이후 궁중 예술로 발전한 까탁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8개의 고전 무용이 있어요. 까탁은 그중 하나인데, 유일하게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를 융합한 다원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이슬람과 힌두는 지금 보면 대립되는 종교인데, 이들을 하나에 섞어 조화를 이루었다는 게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갈등과 분리의 세계에서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융합되어 있나요?


테크닉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힌두교에서 발생한 인도의 고전 무용처럼, 주로 얼굴 표정이나 무드라(손동작)로 신에 대한 헌신을 표현해요. 한편 회전 동작이라거나 우아하게 상체를 쓰는 동작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권의 무용에서 비롯된 거죠.


까탁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얼굴 표정과 무드라로 신에 대한 헌신을 표현한다.


내용적인 면으로 봤을 때에는, 인도 고전 무용은 주로 사원에서 시작되었다 보니 신에게 헌신하는 기도의 내용을 다뤄요. 한편 같은 시기 중세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수피즘(Sufism) 운동이 활발했어요. 수피즘은 기존에 문자주의적, 교리적인 종교에서 벗어나서 신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중시하는 운동이에요. 그 당시 얼마나 위선적인 성직자가 많았겠어요? 거기에 질린 사람들이 교리보다 신에 대한 마음을 강조하고, 신과의 사랑과 합일을 시로 표현한 것이죠.


특히 유행했던 것은 라다와 크리슈나 테마예요. 크리슈나는 신이고, 라다는 처녀인데 인간의 영혼을 상징해요. 둘이 연인 사이고요. 남과 여의 굉장히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는 거예요. 까탁에서는 춤을 통해 라다와 크리슈나의 사랑을 많이 표현해요.


라다와 크리슈나


까탁이란..
“내면에 감춰진 신성을 만나고 그 존재와 합일하는 춤”
“신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춤이자, 때로는 신의 아바타가 되어 추는 춤”
“그 신이 절대적 힘을 가진 쉬바나 사랑스러운 연인 크리슈나, 어머니 두르가 여신이 될 수도 있고 이슬람교의 알라가 될 수도 있고, 스승,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누리의 블로그 글에서 발췌



그럼 까탁은 민속춤인 건가요?


민속 무용과 고전 무용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전 무용에는 계보가 있다는 거예요. 스승에서 제자로 전달되고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해요. 반면 민속춤은 명절이나 행사에 누구나 출 수 있는 즐거운 춤이죠. 까탁은 계보가 인도에서는 엄격한 면이 있어 고전 무용으로 분류돼요. 예를 들어 스승님께 인사드릴 때 발목에 다는 방울을 가져와서 축복을 받고, 선생님 발을 터치해야 해요. 전통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요.



그럼 외국인으로서는 배우기 어렵겠네요.


하지만 저희 선생님은 그렇게 전통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너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웃음). 덕분에 부담 없이 배웠죠.



까탁이 누리 선생님의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까탁에는 캐릭터가 있고,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꾼’이 어원인  까탁에는 캐릭터와 스토리가 있다.


이란에서 공부할 때 인종차별적인 모욕이 너무 힘들었어요. 사회적 소수자의 감정을 그대로 느꼈죠. ‘난 왜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지? 난 왜 이렇게 힘들어하지?’라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거 소중한 감정이니까 춤으로 바꾸라고. 그때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춤을 췄던 것 같아요. 내 경험을 춤으로 승화시킨 거죠. 그 뒤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런 작업을 해요. 창작이 삶의 경험을 소화하는 방식이 된 것 같아요.


창작은 참 신기해요. 터키에서 남자친구와 있다가 헤어지고, 여행을 다니며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면 즉흥적으로 춤추는 영상을 녹화했어요. 그 영상에서 어떤 진실성이 느껴졌나 봐요. 조회수가 200만 넘게 나왔고, 최근 인도에 갔을 때 만난 한 브라질 분은 남편과 이혼한 뒤 그 영상을 보고 저를 만나고 싶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자신의 경험을 춤으로 소화시킨 누리의 영상. 조회수는 270만이 넘었다.



춤은 하나의 수행이라는 글을 봤어요. 선생님은 춤으로 수행을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수행이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서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까탁은 춤을 통해 합일감을 표현해요. 까탁의 동작은 손이 가슴에서 시작하는데, 나와 내 가슴으로부터 (손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우아하게 움직이며) 각각 하늘과 연결, 땅과의 연결, 세상과 연결, 다른 사람과 연결을 표현하거든요.


영어로 Surrender라는 말이 있어요. 기도할 때 나 자신을 내던져서 바치는 느낌이 비슷해요. 나는 작은 존재지만 신, 우주 같은 어떤 큰 존재가 와서 내 안에서 춤을 춘다. 예를 들어 제가 크리슈나가 되어서 춤을 출 때, 마치 신이 되어서 춤을 추는 것처럼 충만한 느낌이 들어요.


직접 구음을 녹음하고 음악 제작에도 참가했던 작품



무아지경 상태가 되나요?


항상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상태가 될 때가 있어요. 최근에는 발동작을 굉장히 열심히 연습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단순한 동작이에요. 그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방울 소리가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들리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내가 자연의 소리를 낸다는 사실에 깊이 집중하는 것, 그런 순간이 수행이 아닐까 싶어요.


"방울 소리가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들리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제가 터키에서 만난 수행자 분이 있었어요. 배불뚝이에 안경을 쓴 평범한 아저씨였는데,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은 아는 굉장히 유명한 영적 구루였죠. 그분이 하는 일이 펠트 공예를 만들어 파는 거였어요. 저게 그분에게 산 거예요.


선물 받은 펠트 공예. 스튜디오의 한쪽 벽에 걸려있다.


제가 그곳에 수피춤을 배우러 갔었거든요. 그분이 하신 말이 그거였어요. “다음에 오면 수피춤을 배우지 말고 펠트를 배워라, 이게 명상이다. 일상에 명상이 있다.” 그분은 수십 년간 진리를 찾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대요. 그러다 자기 고향으로 와서 진리를 발견한 거예요. 자기가 하는 일에 뭐든지 몰입할 수 있다면 명상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분이 발견한 진리였어요.


신을 표현했을 때의 느낌이 합일감이라면, 단순한 동작을 했을 때는 몰입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 둘은 결이 약간 달라요. 몰입감을 느낄 때에는 나와 동일시했던 스트레스를 좀 더 떨어져서 보게 되죠. 분리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춤을 어떻게 가르치나요?


전통적으로 인도의 까탁 선생님들은 6개월 동안 발동작만을 주로 가르쳐요. 까탁은 발에 100개의 놋쇠 방울을 차고 리듬을 만들어내거든요. (아까 소리를 들었는데 굉장하더라고요.) 까탁은 시각적인 요소만큼이나 청각적인 요소도 중요한 춤이에요. 하지만 저는 움직임의 원리와 몸의 연결성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까탁은 발에 100개의 놋쇠 방울을 차고 리듬을 만들어낸다.


지금 삼 년째 까탁을 가르치고 있는데, 저의 방향은 ‘힐링’이에요. 저는 누구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큰 존재와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까탁은 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춤인 만큼 까탁을 통해 더 풍성한 연결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수강생은 어떻게 알고 오나요?


대개는 인도 문화, 요가나 영성에 관심 많으신 분들이에요. 영성과 관련된 춤이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인도 춤은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좋죠.



현대인에게 춤을 추천하고 싶다면 그 이유는.


춤을 추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오늘 수업받은 학생도 20년 넘게 엄마로 살았는데 까탁을 추며 여자가 된 것 같다고, 사랑에 빠진 느낌이라고 해요. 헬스를 오래 하신 분인데, 부드럽게 몸을 움직여보는 것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까탁을 통해 자신도 섬세한 움직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좋았다고.


예술을 하지 않으며 일상을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리는 것이 있어요. 춤은 감각과 감정을 생생하게 해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생동감을 찾아줄 수 있죠.



마지막으로 이 공간과 이 공간에서 열리는 수업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90년대 초반에 지어진 굉장히 오래된 건물이에요. 보자마자 채광 때문에 마음에 들어 계약했죠. 채광과 통풍이 좋은 데다 식물이 많아서 낮에 이 곳에서 수업을 하면 정원에서 춤추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아래층이 비어있어요. 까탁에서는 발 동작을 하기 때문에 소음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워요.


합정에 위치한 라스스튜디오. 빛이 잘 든다.


이 공간에서 동생은 요가를, 저는 까탁과 인도 민속무용, 수피춤을 가르치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월 1회씩 수피댄스 워크숍을 열까도 생각 중이에요. 다음에 저녁 수업을 할 때 놀러 오세요. 저녁에는 수업을 시작할 때 신상과 꽃 주위에 있는 기름 램프에 불을 켜고 그 아래에서 춤을 추는데, 이국적이고 은은한 조명 때문에 마치 진짜 인도에 온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누리님 감사합니다.

무용수/안무가 누리 인스타그램

라스 요가&인도무용 스튜디오


사진

누리 인스타그램 & 블로그, 라스스튜디오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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