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 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강, 2024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비가 오는 날이면 감히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다시 되뇌어 봅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일인칭'으로 경험하고 있음을 깨달은 경이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춘 횡단보도에서 마주 선 사람을 보며 '8살의 소녀 한강의 일인칭'을 상상해 봅니다. 제 기억 속 비 오던 8살의 날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아마 한강 작가가 말한 '일인칭의 경이'는 '나를 넘어, 타인의 감각과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공감의 태도'이겠지요.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타인도 각자의 시선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 일 것입니다. 즉, 나만의 경험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경험을 진지하게 느끼고 이해하려는 노력인 것이죠.
아마, 이 수상 소감이 저에게 오랫동안 메아리치는 이유는, 이것이 저의 업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매일 환자분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말을 통해서, '환자분의 삶을 일인칭으로 공감하고 상상하는 것', 이 과정을 통해 환자분의 삶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것, 그러한 경험에 잠시 함께 머물게 되는 것이, 매일 진료실 작은 책상 앞에 앉은 저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환자분이 절대적이라고 느끼는 경험의 틈을 비집고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에 체온을 깃들이고, 희망을 찾고 순수한 응원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우연한 기회에 환자분들께 약간의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저 머물게 되는 것이 전부인 날도 허다합니다. 그런 날에는, 너무 깊이 '타인의 폐부'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과의사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도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힘든 이야기 듣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타인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닿아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습니다. 때로는 너무 깊숙이 들어가 슬픔과 아픔을 내 것으로 흡수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타인의 내면을 진심으로 만나는 경험, 그리고 저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하게 되는 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은 놀랍도록 진실되고 의미 있는 순간을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Some people feel the rain,
others just get wet.
어떤 이는 비를 느끼고,
다른이 그냥 젖기만 한다.
로저 밀러(Roger Miller)
환자분들께서 제게 본인의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저는 그저 비를 맞는 사람이 아니라, 그 빗방울 하나하나를 느끼듯 환자분의 마음을 느끼려 합니다. 환자분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 삶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결된 순간들 속에서 때로 환자분들은 스스로 나아가는 힘을 발견합니다.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순간만큼, 우리가 삶을 진실되게 느끼는 순간도 없습니다.
환자분들도 자신의 폐부를 드러내 보이는 정신과 진료는 이토록 두려운 경험을 감히 시도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정신과의사들은 진료실이라는 최소한의 장치 속에서, 환자분의 '일인칭'에 진입하여, 환자분께서 느끼는 감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중에는 반대로 '회복의 경험'을 진실되게 연결하는 희망의 체온이 됩니다. 고통과 함께 하는 만큼 회복의 희망과도 함께 합니다.
그래도, 저는 환자분들이
나아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로저 밀러가 이야기 한 '비를 느끼는 것' 역시, 삶의 모든 순간, 심지의 고통의 순간마저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태도를 뜻합니다. 빗방울이 우리의 옷을 젖게 할지라도, 습기와 추위를 감수하며 더욱 생생히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 그리고 타인의 내면의 깊은 곳에 흘러들어 가는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연결과 이해, 성장을 이루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우리가 삶의 진정한 깊이와 따뜻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