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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의사는 '인생의 한문철'일까요?

오해

by 소소한마음씨

요즘 문득, 제가 하는 일이 '인생의 한문철'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블랙박스를 돌려보며 사고의 원인을 찾듯, 저는 누군가의 삶이 충돌하고 부서진 후에야 만나 뵙게 됩니다. 마치 환자분의 '인생 블랙박스'를 함께 보듯,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누가 상처를 주었고 얼마나 다쳤는지를 하나씩 복기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잘못인가요?"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걸까요?"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고, 원인을 정확히 밝혀 책임을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게 있습니다.


사실, 그 사고에 휘말린
모두가 다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명백한 폭력과 가해가 존재합니다. 그런 경우엔 분명히 드러내고 다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많은 갈등은 '악의'보다는 '오해', '의도적인 상처'보다는 '서툰 마음과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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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보다는 '오해'

'의도적인 상처'보다는
'서툰 마음과 표현되지 못한 감정'


대부분


그렇지만 제가 진료실에서 자주 마주하는 것은 조금 더 미묘한 풍경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가 되려 하고, 각자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반복적으로 증명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피해자 되기에 매몰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사고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서로 다쳐 있습니다.



누군가는 너무 조급했고, 누군가는 너무 지쳤으며,

누군가는 눈앞이 흐렸고,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조금 늦게 밟았습니다.

어쩌면 그날은 비가 많이 왔을 수도 있고, 길이 미끄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도,
사고는 날 수 있으며,

결국 모두가 상처를 입었고,
누구도 처음부터 사고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인지를 입증하는 데만 마음을 쏟다 보면, 정작 그 자리에 멈춰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삶이라는 교차로 위에 차를 세워둔 채,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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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누가 더 나빴는지, 누가 더 아픈지를 비교하기보다 환자분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타고 있는 삶이라는 자동차는 누구나 조금씩 고장 나 있습니다. 어딘가 삐걱거리고, 때때로 엔진이 꺼지고, 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죠. 그래서 멈추고, 길을 헤매고, 때론 사고가 납니다.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차로는 더 이상 못 가겠어."

"이 상태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먼저 고쳐야 뭘 하든 하지."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차가 덜컹거린다고
반드시
길을 멈춰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수리와 점검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입니다.


고장 난 차에만 온 마음을 쏟다 보면, 정작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고,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다시 여쭤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가요?


정신과 진료가 판결이나 책임 추궁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시간입니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대신, 모두가 '다친 사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은, 시원하게 '몇 대 몇'하고 말씀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은, 이미 벌어진 사고를 막을 수는 없지만, 다음번엔 덜 다치게 돕는 것입니다. 같은 길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지 않도록 더 나은 길과 더 안전한 속도를 함께 찾는 일입니다.


그저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분과 함께 '기록된 시간'을 보고 마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목적지를 향해 같이 나아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되, 따뜻하게 공감하며 말입니다.


이런 일이 고되고, 지치고, 때론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마음 한켠에서는 마냥 편들어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냉정을 가지고, 이렇게 사고 너머를 함께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다시 운전대를 잡을 용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냥 편들어 드리는 것보다, 운전실력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은, 어쩌면 인생이라는 도로 위에서 다시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돕는 마음의 동행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함께 천천히 나아갑시다.
함께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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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조금씩 고장 난 차를 타고 살아갑니다. 중요한 건 차의 상태아니라, 그 차를 타고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입니다. 방향이 분명하다면, 덜컹거리며 천천히라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차량 고장에 대한 내용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이상할 때는 가까운 카센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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