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R Karma
노력하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스스로에게 과제를 내듯 성실했고, 예의 바르게 굴었고, 가능한 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날, 마음은 텅 빈 창고처럼 울립니다.
저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I’ve been so good
그렇게 반복해도, 질문은 지워지지 않죠. 왜 내가 한 노력이 나에게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나요?
내가 행한 선의가 나에게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우리는 종종 멍해집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정상일까?"
"다들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나만 이럴까?"
AJR의 〈Karma〉는 이 곤혹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My days and nights are filled with disappointment"
낮과 밤에 가득 찬 실망 속에서
"I’m not sure why I booked today’s appointment"
왜 예약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진료실로 들어오면서도 어색해하는 모습이, 제가 오늘도 만나게 될 많은 분들의 모습과 겹칩니다.
AJR의 〈Karma〉를 듣다 보면, 묘하게 위로를 받습니다. 정답을 제시하지도, 무작정 낙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실제로 겪는 감정의 질감을 따라갑니다. 기대—혼란—자책—애써 괜찮은 척—그리고 다시 질문. 이 느린 순환이 부끄럽지 않다고, 누구나 그 길을 지난다고.
한편으로 저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제 마음 한구석에 있는 '선(善)–보상'의 공식을 부끄럽게 드러내 보여야 하기도 합니다. 착하면 사랑받고, 성실하면 보상받으며, 치료를 시작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 이야기. 동시에, 그 공식의 부조리 함을 설명하기도 해야 합니다.
The universe works in mysterious ways
But I'm starting to think it ain't working for me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가지만
그 방식 아마 나랑은 잘 안 맞나 봐요
삶은 늘 복잡하고, 미스테리어스 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나와 맞지 않게 느껴지며, 때때로 정체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우리의 우울-불안을 몰아내려고 더 노력합니다. 더 친절하고, 더 열심이고, 더 "불편한 감정을 해결하려"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노력은 감정의 더 압축시켜,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I've been so good
Why am I feeling empty?
요즘 잘 지냈어요.
근데 왜 이렇게 공허하죠?
진료실에서도 이런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다고 했는데, 왜 외롭고 불안할까요?"
그럴 때 저는, '노력'이나 '선함'을 결과의 보증서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으로 다시 정의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선함은 거래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오늘의 친절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아도, 그 친절은 오늘의 나를 조금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그 견고함이 쌓일수록, 보상은 '등가의 행운'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으로 귀속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으로 살겠다." 그 선언은 우주가 일일이 영수증을 끊어주지 않아도 유효합니다.
〈Karma〉는, 환자분께서는 어느 순간 이런 부탁을 합니다.
Please give me instructions,
I promise I’ll follow.
설명서를 주세요,
그대로 따를게요.
그런 게 없는걸요
마음이 고장 난 가전제품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정확한 진단명과 처방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회복은 종종 설명서 이전의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인정'과 자신에 대한 '친절'에서 시작됩니다.
감정과 생각에 이름을 붙이면, 그 생각과 감정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의 목소리'로 바라보는, 감정의 압도에서 아주 조금만, 한 발짝만 물러나면, 그건 '나'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경험'이 됩니다. '경험'은 지나가지만, '나'는 남습니다. 우울과 불안,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그릇'에 담겨 있다가 빠져나갑니다. 이렇게 아주 조그만 거리가 생길 때 비로소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비교.
"남들은 다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지?"
우리는 타인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나의 비하인드를 비교합니다. 비교는 나를 '결함 있는 제품'으로 위축시킵니다. 이때 필요한 건 더 큰 노력이 아니라 '나에 대한 친절한 시선'입니다. 같은 하루라도,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반복해 온 작은 선택들 (예, 제때 잠자리에 든 하루, 산책을 한 세 번, 미뤘던 메시지를 보낸 한 번)의 '경향성'을 기록해 보세요. 보상이 늦더라도, 삶이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가 생깁니다.
반응은 보상보다 먼저 오고,
더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노래가 던지는 또 하나의 뼈 있는 가사
You say that I’m better, why don’t I feel better?
제가 나아졌다고 하는데 왜 난 못 느끼겠죠?
활동성에 호전이 보이고, 주변에서는 좋아졌다고도 말하는데, 몸과 마음은 아직 무겁습니다. 여기서 '좋아짐'을 '10점 만점'의 합격이 아니라 '충분히 좋은 6점'으로 재설계하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의 6점은 내일의 6.2점을 부릅니다. 회복은 직선이 아니라 전진과 후진, 조그만 진전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I’m trying hard, yet I feel empty.
최선을 다했는데 왜 공허하죠?
I’ve done everything right.
정말 다 맞게 해 왔는데요.
Doctor, should I be good this year?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 올해도 착하게 살아야 할까요?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로.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네, '좋게'
살아요.
기꺼이요.
네, ‘좋게’ 살아요. 하지만, 그 ‘좋음’을 보상을 얻기 위한 것으로 쓰지 말고,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쓰세요. 대가를 지불하고 '행운'을 교환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데 까지만 할 수 있는걸요. '진인사대천명'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합니다.
'선함'은 비용이 아닙니다. 선함은 당신의 목소리, 걸음, 표정, 관계의 결입니다. 우주가 신비롭게 작동하지 않는 날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중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친절 한 줌, 책임감 한 스푼, 나와 타인에게 보내는 짧은 안부. 그런 자잘한 중력이 모여, 비어 있던 내부에 다시 밀도를 만들어냅니다.
그래도, 물어보시겠죠?
Where the hell is the karma?
그렇게 하면, 저에게 돌아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