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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초밥 Aug 19. 2023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

아버지의 엄마 03

그랬다. 할머니는 글을 쓸 줄 몰랐다. 열대여섯 살 쯤이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고 스물이 채 되기도 전에 첫 아이를 낳았을 터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차치하고서도 그 시절 시골에서 여자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강아지들이 유치원에 다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며칠 뒤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할머니 물건 정리할 건데, 남기고 싶은 물건 있으면 챙겨도 돼.”

나는 할머니의 물건들 틈에서 그 작은 검정 수첩과 할머니의 염주를 꺼내 들었다. 염주는 할머니가 항시 손목에 팔찌처럼 차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잘 때도, 학교에 가서도 그 염주를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그 염주에서는 할머니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저 병든 이의 몸에서 나는 다소 퀴퀴한 냄새였을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을 때까지 그 염주를 가지고 다녔다. 그 검정 수첩이 언제 내 손을 떠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수첩은 염주보다 더 먼저 내 손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염주보다 더 진한 향기로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고 있다.


수첩의 마지막 장 할머니의 이름 아래 똑같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숫자 1부터 9까지가 적힌 것은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본인의 이름을 재차 확인한 그날로부터 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할머니는 내게 다가와서 그 숫자들이 바르게 적혀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무심하게 “맞네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나중에 다른 것도 더 써줘라잉.”하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 이름 석 자와 숫자 외 그 수첩에 다른 것을 쓰는 날은 오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을 점차 꺼리게 되었고, 할머니의 방에 가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그토록 따뜻하고 태양 같았던 할머니는 항암치료가 거듭될수록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사그라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할머니 곁에서는 병자 특유의 은근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얼마 더 지나자 할머니의 방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다. 냄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방에 들어갈 때면 마치 암이라는 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암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반복되는 수술과 항암치료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거실은 할머니에게 너무도 먼 공간이 되었다. 할머니는 방에서 거의 나오실 수 없는 상태였고, 기운이 도실 땐 간혹 앉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누워서 보내셨다.


할머니 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이후, 모두가 할머니 방에 들락거리기를 주저하게 된 이후, 누구보다도 할머니 방에 더 자주 들락거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엄마였다. 나만큼이나 몸집이 작은 엄마는 할머니의 맨살을 젖은 물수건으로 닦아주기도 하고, 할머니의 요강을 비워드리고, 할머니의 용변을 닦아주기도 했다. 가끔 할머니를 씻겨주는 일 또한 엄마가 담당했는데, 그런 날에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방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병 때문에 야위고 말라갔을 할머니이지만, 엄마의 작은 몸집에 기댄 채 함께 흐느적거리며 움직일 때면 엄마의 몸은 한층 더 가냘파 보였다.


그날 그 계단에서 오빠로부터 할머니의 병명을 듣자 뒤죽박죽 했던 모든 기억이 더 또렷해졌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할머니는 몇 달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그 뒤로 몇 년을 더 투병하셨다. 말년에는 대장과 직장 근방을 모두 들어내는 수술을 했던 것인지 스스로 용변을 보실 수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가 아픈 뒤로 할머니 방에 쉽사리 들어가진 못했지만,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엄마가 아픈 할머니를 어떻게 간병하는지 봐왔다.


할머니의 배꼽 옆에는 어느 순간부터 투명한 베이지색의 의료용 비닐주머니가 달려있었다. 마치 물티슈 뚜껑을 연상시키는, 입구를 여닫을 수 있는 주머니였다. 동그란 캡 한쪽은 할머니의 배꼽 옆 피부에 부착되어 있었고, 한쪽은 비닐주머니에 부착되어 있어서 할머니의 몸에 그 비닐주머니를 붙여서 고정할 수 있는 구조였다. 캡이 부착된 할머니의 피부 안쪽에는 피부가 아닌 다른 것이, 썩은 나무뿌리 색의 슬프고 동그란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암 덩어리인 줄 알았다.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면 엄마는 제일 먼저 요강을 비우고 할머니의 배꼽 옆에 달려있는 주머니에 묻은 검붉은 무언가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깔끔하게 닦아냈다. 내가 암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잘려 나간 할머니 대장의 일부였고, 그 주머니는 옆구리로 삐져나온 대장을 통해 할머니가 용변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소위 ‘대변 주머니’였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2000년 아버지의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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