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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살이든지 결혼살이든지, 뭐든지

- 쉽지 않더라

by Cha향기

결혼해서 고향을 떠나도 유분수지,

신접살이는 너무 먼 곳에서 시작됐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던진 채로...


어머니가 밤낮없이 바쁠 것이라는 걸 뻔히 알았지만

달려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죽은 송장이 꿈지럭해야 정도라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고향을 출애굽하듯 떠나왔다.

그 발길이, 고향에 되돌아가지 못할 마지막이란 걸 그땐 몰랐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꿈속에 간간이 가 보거나

로드뷰로 온라인 귀향을 간접 체험할 뿐이다.


가족은 깡그리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마저 그 산천을 떠난 지 오래다.

윗마을 양철 대문이나 마루 위에 있던 비밀창고 같았던 다락도 온데간데없을 것이다.

장터 안 점포는 진작에 허물어졌겠지.


산천만 의구할 뿐이리라.

파랗던 하늘은 세월이 흐르든 말든 여전히 새파랄 것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은 말없이 무뚝뚝한 모습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일 것이다.

고향, 그 옛집, 장터 점포와 도로변 상가를 마음속에만 품고 있다.




남편은 국가직 공무원이었다.

결혼 당시 남편 근무지는 안양이었다.

그러다가 몇 개월 후에 시댁 근처 전남으로 자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남편이 그러자고 한다고 나는 그냥 따랐다.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다니며 7년여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남편은 서울 시험소로 차출 발령을 받았다.


딸은 8살, 아들은 5살 때였다.

어느 날, 남편이 어지럽다고 하더니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검사란 검사를 다 받았다.

뇌파, 심전도, 뇌촬영 등등.

검사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남편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는데도 의학적으로는 병명은 없었다.


남편이 병가를 낼 수밖에 없어서 진단서가 필요했다.

그러자 의사는 내게 두꺼운 의학사전을 내밀었다.

남편 증상과 가장 비슷한 병명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다.

요즘 같으면 AI한테 증상을 말하고

의심되는 병명 열 가지만 말해달라고 했더라면

뚝딱 알려줬을 텐데...

30년 전만 해도 그런 게 되지 않았다.


남편은 정신만 멀쩡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침대와 한 몸처럼 묶여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 사실, 나 고백할 게 있어.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어.

이번에 살려만 주신다면

주의 종이 되겠다고 기도하는 중이야.


그렇게 하면 당신은 괜찮겠어?


중환자실 면회를 하러 들어간 내게 남편이 말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안정적인 공무원을 내려놓고
때늦은 신학 공부를 한다고?
그것도 목사가 된다고?


그러나 침상에서 고개도 뗄 수 없는 남편이 하는 말이라 가타부타할 수 없었다.


- 할 수 없죠. 당신이 그렇다면 어쩌겠어.

라고 말했지만, 나는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게 제일 싫었다.


중학교 때 시골 교회 목회자 사모의 삶을 본 적이 있다.

전도사인 남편이 신학교에 가고 없으면

그 사모는 어린 아기를 업고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 모습이 참 처량해 보였다.

사택에는 먹거리도 거의 없었고, 모든 성도가 사모의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나는 절대로 목사 사모는 되지 않을 테야.'

그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결심했다.

그즈음에 나를 목회자 사모 쪽으로 소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천생 사모감이라나, 어쩐다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는 담을 쌓고 싶었다.


런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사모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남편은 기적적으로 회복됐다.

그는 10년 넘게 근무했던 공직에 사표를 던졌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으로부터 가장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래도 학교 기간제 교사로 나가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설령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제2 외국어는 워낙 티오가 적었을 것이다.


남편은 신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주말에나 돌아왔다.

어린 남매를 돌보며 할 수 있는 것으로

학습지 방문 교사가 괜찮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을 때,

신문 광고란에 ‘영어 공부방’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차별화된 영어 학습법이었다.


- 이거네, 딱, 이거네.


당시, 학습지로 반복학습하는 게 열풍이었다.

그런데 시청각을 통한 영어 학습이란 것에 끌렸다.


영어 노래와 게임을 통한 ICT 기반 학습이었다.

그 활동을 학습지로 다시 한번 다지기 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매달 한 번씩 원어민이 공부방으로 와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실용영어 위주 커리큘럼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방은 인근에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그 일대에서 그런 방식 공부방은 없었다.

공부방 회원이 되려면 대기자 명단에 올려두었다가

빈자리가 나야만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학생들 성적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가정 통신문을 만들어 학생의 학습 상태를 면밀히 알리며 학부모와 소통했다.

그런 관리를 학습지 교사는 생각하지도 않던 때였다.


그룹 과외 형태였는데 수업에 는 학생이 있을 때면

기다리는 동안 영어 게싱 게임을 했다.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알아맞히려고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답을 알아맞힌 학생에게는 스탬프를 찍어주며 동기유발을 불러일으켰다.

자투리 시간 활용이었지만 학생들 영어 듣기 훈련에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전국 <최우수 공부방>이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영어 스토리북 읽기 학습 모형의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배역을 정해주고 연극 연습을 하게 한 후에

문화 회관을 대여하여 영어 연극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먼 곳에 사는 학생들은 그룹을 만들어 놓고 출강을 요청했다.

가장인 남편이 하루아침에 신학생이 되어버린 우리 가정에

그 공부방 운영은 경제적으로 큰 보탬이 됐다.

대타 선수가 싱글 홈런을 친 격이다.


고3 시절 이후로 팽개쳐두었던 영어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살아났다.

원어민과 소통하게 됐고 매일 영어 속에서 사는 나날이었다.


영어 공부방 운영을 10년 정도 했을 즈음이었다.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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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영어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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