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 중반에 봤던 임용고시 1
연수 막바지에 서서히 부전공 연수 제도 베일이 벗겨졌다.
사실, 나는 부전공 연수만 끝나면 발령이 나는 줄 알았다.
정보를 주고받을 만한 사람도 없고 인터넷을 쉽게 검색하던 때도 아니었다.
그런데 연수 후에 임용고시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다른 수험생들과 한 자리에 섞여, 같은 시험지로...
그리고 2차, 3차 시험도 다 통과해야 한댔다.
그냥 부전공 연수를 포기하고 돌아갔던 사람들이 현명했던 것 같았다.
20년 넘게 묵힌 신세가 된 것도 억울한데 힘든 관문을 통과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돌고 돌아가는 길이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그게 끝이 아니었다.
교육학이란 과목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정보에 빠른 연수생들은 이미 교육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뿔싸, 일찌감치 포기할걸...
집을 떠나 와서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는데
여차하면 임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헛물만 켰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연수 신청을 하고도 곧바로 포기한 사람, 시작한 당일에 되돌아간 사람,
연수를 받다가도 중도에 떠난 사람들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연수가 끝나자 짐을 싸 들고 집으로 복귀한 후에
곧바로 노량진 고시촌 학원에 등록했다. 교육학 공부가 시급했다.
학원을 다녀본 적 없었는데 다 늦은 나이에 지옥철에 몸을 욱여넣어가며
학원에 다니는 내 처지가 측은했다.
학원 주변과 강의실 안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오픈런을 노리는 그들의 어깨가 안쓰러웠다.
아예 사람처럼 살기를 거부한 모양새로 자리를 틀고 지내는 듯한 이도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혹시 학원 수강을 해서 자녀에게 가르치려고 온 학부형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것 참 극성 아주머니를 다 봤네, 했을 것이다.
아니겠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아예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
공부 외에는 보이는 게 없는 이들이었다.
교육학을 수강하러 간 김에 영어 과목도 수강했다.
그런데 학원 수업을 한 시간 들었다면 그걸 다 숙지하는 시간이
서너 시간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강의만 들으면 그건 내 실력이 될 수 없었다.
강의 들을 때 긴가 민가 했던 것을 별도로 시간을 내어 확실하게 이해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 숙성 시간이 필요했다.
연수를 끝낸 후 3개월 정도의 임용고시 준비 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노량진 학원에 다녀보니
차라리 스스로 공부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오고 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고 강의를 듣기만 하는 것은 큰 유익이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만 휘저어 놓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가라앉혀 내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될 것도 같았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 답이었다.
그래서 두꺼운 교육학 수험서를 각 챕터 별로 분철했다.
교육 과정학, 교육 심리학, 교수 방법 및 교육 공학, 교육 사회학, 교육 철학 등등.
나는 공부에 게으른 사람이다.
이해하고 적용하는 공부 방식에 최적화된 내게
암기하여 외워두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이 교육학이었다.
내 체질에 맞지 않는 과목이었다.
기억했거나 외웠던 것이, 포맷 잘되는 컴퓨터처럼 싹싹 지워져 버리는 나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영어는 둘째로 치고 교육학이 내 발목을 잡을 판이었다.
그런데 교육학 이론을 공부한 후에 모의고사를 보면 나름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나이 들어 공부하니 기억력은 떨어졌지만,
그 대신에 시험 발문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은 좋았다.
무엇을 묻는지 이해됐고 각 문항을 읽으면 어떤 게 답인지 가늠이 됐다.
그러나 워낙 공부할 분량이 많아서
앞부분을 공부하면 뒤엣것을 잊어버리고
뒷부분을 하다 보면 앞에 했던 이론이 까마득해졌다.
게다가 교육 통계학은 그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료(데이터)를 수집, 정리, 분석, 해석하여 불확실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고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인데
그런 건 배워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이론을 스스로 공부해 낼 재간이 없었다.
‘챗GPT’도 없던 때였고 검색 기능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차라리 교육 통계학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쿨하게 포기해 버리자.
이해되지 않는 것을 알려고 애쓰느니
통계를 묻는 문제가 나오면 그냥 찍거나 틀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심한 듯 하지만 때론 과감할 때가 있다.
교육 통계학을 포기할 때 내 결단이 그랬다.
게다가 또 다른 애로가 있었다.
영어 전공 시험을 본다는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150분 동안 숨죽이고 앉아서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을는지?
실력 쌓기에 앞서서 시험을 칠 수 있는 체력 뒷받침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시험 치는 동안에 의자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문제를 읽으며 답을 궁리할 수 있는 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 생고생을 하니 '불어교육'이라는 내 전공이 애물단지 같았다.
말썽쟁이처럼 끝끝내 내게 달라붙어 나를 못살게 했다.
학습의 정도를 체크하기 위해 보는 시험이 아니라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려고, 나는 영어 모의고사를 매일 봤다.
방 안에서 혼자 시험지를 붙들고 뒹굴거리며 버텼던 일은 나만 아는 비밀이다.
부전공 연수는 내 몫의 십자가였다.
아무도 내 십자가 모퉁이조차 잡아주거나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어 모의고사를 풀다 보면 한 시간도 못되어 몸이 비틀어지며
정자세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좀이 쑤셨다.
어쩌면 임용고시 보는 날 자세가 불량하다고 퇴실 조치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제지를 집어 든 채, 누웠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모의고사를 풀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가 되어 본 적이 있다면 그때였다.
때로는 모르는 단어가 보였다. 어쩌지?
우리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을 읽는다 치면 거기 나온 어휘를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 작품을 읽어내지 않는가?
맥락으로 보면 그 어휘가 놓인 자리가 서술어인지, 목적어인지 알 수 있다.
그럴 때는 감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약간의 운이 따르면 정답을 찾을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몰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에 18시간 이상 수험서를 끼고 살았다.
공부하느라 갇혀서 지냈던 침침했던 방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때라도 골백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했던 일이라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멈춘다면 아니 감만 못한 일이다.
그래서 꿈에나 있을 법한 일, 내가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이미지 트레이닝 했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 공부에 매달렸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재래시장 옆에 살았던지라, 남편이 갖가지 과일을 사 와서 반찬 통에 담아
냉장고 안에 차근차근 쌓았다.
내가 간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고 맛있는 반찬을 할 시간도 없었다.
고3이었던 딸을 위한 수험 뒷바라지를 1도 못했던 못난 엄마였다.
중3이었던 아들의 방황도 못 본 체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여러 가지 과일을 반찬 삼아 먹으며 지냈다.
수험생인 나도 틈틈이 과일이나 야채 스틱을 먹었다.
남편은 요리에 손방이라 시장 반찬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해는 내 인생과 한 판 승부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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