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과 트래킹 사이
무더위를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여름을 즐길 곳을 찾아보았다. 아이러니하게 그곳은 집보다 더 뜨거운 남프랑스에 있는 카시스(Cassis)였다. 카시스의 보물로 여겨지는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만인 칼랑크(calanque)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행복했다. 카시스를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 마르세유를 경유했다. 마르세유로 가는 길에 칼랑크들의 위치를 찾아보았는데 기차역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구글 지도를 믿지 않고 막상 카시스 역에 도착하면 금방 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낙관론을 품은 채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 Qui a vu Paris, s'il n'a pas vu Cassis, peut dire : je n'ai rien vu »
파리는 보았지만 카시스를 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Frédéric Mistral 프레데릭 미스트랄(프로방스 출신 시인)
마르세유의 도착과 카시스 행 기차의 출발 시간 사이엔 단 5분이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고 얼른 전광판에서 카시스 행 기차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핸드폰에서 기차 플랫폼을 찾은 뒤,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지척 거리의 플랫폼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차를 볼 수 있었다. 30분 뒤에 있는 기차를 다시 예매하고, 친구가 집에서 싸 온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2번째 기차는 놓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입석이었고 화장실 앞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중학생쯤 돼 보이는 3명이 표 검사를 피해 화장실로 숨는 걸 볼 수 있었고, 그들 때문에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할머니, 그 사실로 화가 나 화장실 문을 인정사정없이 두드리는 아저씨와 함께 심심할 틈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카시스 역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 역인 카시스 역은 뜨거웠고 분홍 꽃이 오래된 역 건물을 덮고 있었다. 역을 나와 한 칼랑크를 검색하니 걸어서 2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일단 걷기로 했다. 아마 여행은 자고로 걸어서 해야 한다는 개똥철학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주머니 가벼운 학생의 눈물겨운 몸부림이 합쳐진 결과일 것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사과를 먹으며 원색의 꽃들과 열대 나무들이 황토색 집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마을과, 흰 석회암이 깔린 포도밭을 마주쳤다. 사유지라고 적힌 팻말 뒤에는 포도밭에 둘러싸여 있는 울창한 나무에 비밀스럽게 가려져 있는 농부의 집이 보였다. 1시간을 걸었을까 건물 사이로 바다가 점차 모습을 드러났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안 절벽 중 하나인 카나이 곶( Cap Canaille)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내엔 작은 성당이 길 곳곳에 있기로 유명한데 이번 여행에서 도심을 볼 시간은 없었다. 카시스 항을 지나 베스투앙 해변(Plage du Bestouan)에 도착했다. 작고 아름다운 몽돌 해변에 많은 사람이 비치타월을 깔고 일광욕하고 있었다. 여기서 놀까 고민했지만, 이왕이면 시내에서 멀리 있는 칼랑크 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고급 빌라들을 지나며 여유롭게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을 거슬러 칼랑크를 정복하기 위한 투사처럼 발걸음이 이어갔다. 날씨와 투쟁을 하며 계속 걷자, 어느새 도로는 흙길로 바뀌었다.
칼랑크에 가기 위해선 칼랑크 국립공원(parc national des Calanques)에 들어가야 했다. 국립공원 초입에서 어떤 여성분이 지도를 들고 서있었다. 나도 모르게 물건 파는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 알고 보니 방문객들이 트래킹 하기 적합한 신발을 신고 있는지 충분한 물을 가졌는지 확인해 주는 분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가려는 칼랑크 덩보(Calanque d’En-Vau)는 1시간 더 가야 하고 마실 물이 1.5리터 정도 필요하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셨다. 물은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살 수 있었는데, 현금만 받는 곳이었다. 주머니엔 단돈 2유로 동전 하나밖에 없었고 500밀리리터 물 밖에 살 수 없었다. 물을 아껴 마시며 다이빙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미끄러운 석회암을 조심조심 디디며 목적지로 향했다. 미끄럽고 험한 돌길을 지나서야 마침내 카시스에 온 이유인 칼랑크 덩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충 짐을 풀고 비치 타월로 몸을 가린 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수온에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몸에 물을 몇 번 뿌린 후에야 몸을 완전히 바다에 담글 수 있었다. 수영을 못해 물속을 둥실둥실 걸어 다니며 땀을 식혔다. 완전히 식은 몸을 바다에서 꺼내 비치타월 위에 누웠는데 땡볕 여정의 피곤함이 몰려와 일어나기 싫었다. 잠자고 싶었지만, 해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가방에서 한껏 녹아 초콜릿이 흐르는 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떠나기 직전에 몸을 바다에 한 번 더 담근 후 다시 기차역을 향해갔다.
물을 아껴 마시며 석회암 위를 걸으니, 신발은 하얗게 변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지는 땀에 젖었고 갈증은 극에 달했다. 유럽에서 유일한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해양과 대지를 아우르는 국립공원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국립공원을 빠져나와 한참을 걸어 베스투앙 해변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음료 파는 곳이 보였다. « 콜라 주세요. » 이 말에 점원은 캔을 꺼내주었다. « 더 큰 거 없나요? »라는 내 말을 들은 점원은 우리의 타들어 가는 속을 이해하는 표정으로 더 큰 페트병 콜라를 꺼내주었다. 당장 코카콜라 주식을 사고 싶을 정도로 맛있게 느껴지는 콜라를 빠르게 마셨다. 기차역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시내를 걸었다. 그렇게 탄 버스 안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었고 그제야 루이 14세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절벽이라고 칭송했던 카나이 곶의 웅장함을 감상할 여유가 생겼다. 바다와 해안 절벽, 포도밭을 눈에 담으며 기차역으로 갔다. 녹초가 된 채 도착한 기차역은 한적했다.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작은 역의 고즈넉함이 낮에 시달렸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한 시간을 기다리고 올라탄 기차 안에서 1억 2천만 년 전에 형성된 카시스의 지형을 걸으며 흘렸던 땀과 함께 일상의 걱정과 고민도 같이 타고 흘렀는지 홀가분해진 마음을 발견했다. 휴양을 꿈꿨던 카시스에서 칼랑크들을 찾아다니며 트래킹 했지만, 마음은 충분히 쉰 듯 삶의 무게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가벼워진들 다음에 카시스에 오면 시내와 가까운 해변에서 놀다 가고 싶다고 생각을 떨친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