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아침의 추위가 가신 점심쯤, 도시락을 싸 들고 친구들과 기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타는 단층 구형 TGV가 우리를 싣고 프랑스 남부에 자리한 도시, 아비뇽(Avignon)으로 달려갔다.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아비뇽 TGV 역에 도착했다. 몸에 감돌던 서늘한 가을 공기는 남부의 강렬한 태양을 맞으며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아직도 여름 열기를 머금은 햇볕을 피하고자 선글라스를 쓰고 나서, 아비뇽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탔다. 5분 남짓 지났을까 드디어 아비뇽 중심지에 기차가 멈춰 섰다.
기차역을 나서자, 가장 먼저 성벽이 눈을 사로잡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답게 단단해 보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 정착한 로마인들은 1세기에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도시를 성벽으로 둘렀다고 한다. 도시를 지키던 건축물은 무너졌고, 13세기엔 해자가 있는 이중성벽을 쌓았다. 또한 아비뇽은 알비 십자군을 이끌고 남프랑스로 진군하는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도시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성벽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아비뇽인들은 다시 성을 쌓았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도시에 교황청이 생기고 나서 지어진 건축물이다. 교황 인노센트 6세(Innocent VI)는 1355년에 늘어나는 인구와 도시 규모에 걸맞은 성벽 건설을 명령했다. 1370년 교황 우르바노 5세(Urbain V) 치하에서 완공되어 지금까지 아비뇽을 지키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편의상 성벽 곳곳을 뚫어 도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뚫린 도로 중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통로를 지나 시내에 들어섰다. 시청 앞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가로수들을 지나 아비뇽 교황청 앞 광장에 다다랐다.
광장에서 단단하고 웅장한 성채로 이루어진 교황청을 바라보면서 로마를 관할하는 주교인 교황이 왜 아비뇽에 살았는지 궁금했다. 어쩌다가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교황이 이 도시에서 지내야 했을까? 아비뇽 유수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le Bel)의 대립에서 시작했다. 교황의 프랑스 내정 간섭에 반대한 필리프 4세는 교황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로마 근교를 침공해 자신을 파문하려고 준비하던 교황을 생포했다. 고령에 받은 충격으로 교황은 결국 얼마 후 사망하고, 그의 후임도 금방 생을 마감했다. 필리프 4세의 압력으로 보르도 출신인 클레멘스 5세(Clément V)가 교황이 되었다.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한 교황은 필리프 4세의 바람에 따라 1309년 아비뇽에 교황청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Grégoire XI)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기 전까지 약 70년 동안 아비뇽은 가톨릭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여러 교황이 머물면서 증축된 교황청을 들어가기 위해서 매표소에 섰다. 교황청, 정원, 아비뇽 다리를 다양하게 조합한 가격표가 있었는데,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교황청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가격이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데 정말로 교황청만 들어갈 거냐고 묻는 매표소 직원의 거듭되는 확인에도 재차 그렇다고 답하고 표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옅게 남은 벽화들을 보며 과거에 이 공간에서 있었을 법한 연회와 회의 등을 떠올려 보았다. 연극이나 오페라 등 예술 상연 장소로 활용되는 교황청 한편에는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점점 교황청 건물 위로 올라가자, 중세 궁수들이 화살을 쏘던 장소에 들어섰다. 여러 방향에서 아비뇽을 조망하며 도시 사이사이에 놓인 도로가 자동차보다는 말과 마차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말을 타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가 교황에게 전령을 전하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한참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론강 위에 지어진 아비뇽 다리(Pont Saint-Bénézet (Le Pont d'Avignon))를 보러 갔다.
아시안게임 한일전 축구경기에서 한국이 우승했다는 소식과 지나가는 차 안에서 중국인이라고 외치는 인종차별을 겪으며 강변을 걸어 아비뇽 다리로 향했다. 다리 위를 올라가면 돈을 내야 해서 강변에서 다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에메랄드빛 론강(le Rhône) 위에 일부만 남은 다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흔히 아비뇽 다리라고 부르는 생 베네제 다리의 역사는 양치기였던 베네제(Bénézet d'Avignon)가 1177년에 산에서 내려오면서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비뇽에 다리를 지으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비뇽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비뇽의 주교에게도 이를 전했다. 주교는 주장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무거운 돌을 어깨에 진 뒤, 론강에 던지라고 했다. 천사의 도움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공했고, 아비뇽 다리가 지어지기 시작한다. 베네제의 죽음 1년 뒤인 1185년에 완공된 다리는 프랑스 대도시인 리옹(Lyon)과 지중해를 잇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론강은 신의 분노로 여겨질 만큼 물살이 거센 곳이었다. 작은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야 했고, 물살이 세지면 도강하지 못했던 론강을 폭 4미터, 길이 920미터의 이 다리가 지어지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를(Arles)에서 론강을 건너는 다리가 무너지고 아비뇽으로 수많은 여행자와 상인 등이 몰려들었다. 유동 인구의 증가로 인한 짭짤한 통행료 수입으로 도시는 융성해 갔다. 프랑스 남부에 널리 퍼진 이단 카타리교를 소탕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끌고 나타난 루이 8세가 가한 아비뇽 포위 작전으로 다리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 재건된 다리도 소빙하기로 얼어붙었던 유럽이 녹으면서 생긴 홍수와 진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지반, 유지 보수할 자금 부족 등 다양한 이유로 물살과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다리 아래서 시간을 보내며 생 베네제 다리는 단순히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동요에 나오는 하나의 다리가 아닌, 아비뇽 사람들이 론강의 강한 물살과 잦은 범람에 대항한 역사의 흔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에서 점점 멀어지고 시내로 다시 들어갔다. 관광객이 적은 길을 골라 거닐며 기차역으로 향하며 아비뇽에 온 이유에 관해 생각했다. 아비뇽행 기차표를 끊은 이유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내린 선택에서 비롯됐다. 교황은 교회 소유인 브나스크 백작령과 지척 거리에 있고, 북유럽과 지중해를 잇는 론강이 흐르는 자기 신하의 영지에 속한 도시인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 건립을 결정했다. 그의 결정의 흔적을 보러 온 이 도시에서 7명의 교황이 살았던 교황청의 단단한 성채를 보며 언제든지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그들의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재해나 외부의 힘으로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진 성벽과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혹시 삶은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또 무너진 걸 다시 세우는 연속이 아닐까.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데, 이 파괴가 더 크고 단단한 무언갈 세울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는데, 파편 속에서 파묻혀 슬픔과 우울에 사무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