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上)
일본과 관련된 것 중 어디 안 그런 게 있겠느냐만, 한국인들에게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특히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에게 메이지유신이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터닝 포인트’인 반면, 다른 누군가에겐 근대 이후 비서구 정치사에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보수적/반동적 근대화’의 원류에 불과하다. 얼핏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시각은, 그러나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메이지유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짧게는 1853년의 페리내항, 길게는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튼 17세기 이후부터 일본으로 유입된 서구문물이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만일 페리가 에도만이 아닌 강화도로 들이닥쳤거나, 효종이 하멜을 통해 동인도회사와 접촉했더라면 조선 역시 ‘근대화’가 가능했으리라는 과감한 주장도 서슴지 않고 내놓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지만, 그만큼 서구중심적 역사관에 철저히 얽매여있다. 이들은 서구, 구체적으로는 영불미(英佛美) 3국의 역사로부터 이상적인 ‘근대’를 추출한 후 이를 잣대로 메이지유신이 얼마나 근대적(사실은 서구적)이었는가를 평가한다. 그에 따라 메이지유신은 서구화를 지향했으나 끝내 천황제 절대주의로 귀결된, ‘미완의 혁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한국의 한 원로 서양사학자는 아예 ‘세계사적 맥락’에서 메이지 일본과 유럽의 절대왕정을 동렬에 놓기도 했다. (물론 이는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전후 일본의 역사관을 충실히 답습한 것이다)
막말기(幕末期) 일본사 연구자인 박훈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다. 메이지유신을 동경하든 비판하든 ‘서구’라는 색안경을 벗을 생각을 않기에 당시의 역동적인 흐름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진 그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수많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온 (그러나 별반 실속은 없었던) 말이다. 하지만 박훈의 문제의식은 공허한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학자 특유의 탄탄한 실증과 저널리스트 출신다운 탁월한 감각을 바탕으로 ‘사대부적 정치문화’라는,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전환기를 이해하는 설득력 있는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 경력을 적극 살려 긴 흐름을 꿰뚫는 그럴싸한 테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송(宋) 이후 근세론’을 주창한 교토학파의(근대초극론을 주도한 교토학파와는 다르다!)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떠올리게 하는 박훈의 새 책이 나왔다. 바로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다.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와 언론사 칼럼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온 그가 단독저자로는 처음 쓴 학술서로, 도쿄대 박사논문 『막말 미토번에서 '공론정치'의 형성』과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들을 엮었다. 학술서인만큼 결코 쉬이 넘어가진 않지만, 평소 그의 글에서 여러 인사이트를 얻었던 독자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주로 메이지유신(1868)을 전후한 19세기 중반에 초점을 맞추지만, 우선은 그보다 앞선 에도시대(1603~1868)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저자의 말마따나 메이지유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너뜨리고자 했던 ‘앙시앵 레짐’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거니와, 이 시대 자체가 한국인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는 저자가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의 첫 장을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하는데 통째로 할애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명실상부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엇보다 바랐던 건 전국시대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종결이었다. 다이묘, 사무라이, 사찰, 심지어는 유럽의 상인과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만인이 만인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아수라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될 터였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엄격한 신분제로 재편하여 ‘하극상’을 원천봉쇄하되, 각 ‘이에(家, 혈연가족보다는 법인체의 성격이 강하다)’에게 대대로 세습되는 가업만큼은 확실히 보장해주어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했다.
만인으로 하여금 야망을 버리고 ‘소학행’에 만족하게끔 ‘강제’한 막부의 정책은, 실로 성공적이었다. 17세기 초 1200만 명이었던 일본의 인구는 백 년 뒤 30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인구 100만의 에도, 3~40만의 오사카와 교토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 대도시가 들어섰다. 이를 바탕으로 융성한 대중문화는 당시 세계의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화려했으며, 또 가장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향유되었다. ‘일억 총중류’를 자부하던 1980년대 버블경제기에 견주어도 꿇리지 않을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달성한 ‘만인의 소확행’은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석연료 없이 3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유지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인구가 늘어났다간 맬서스의 함정에 빨려 들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선 ‘마비키(間引き)’라 불리는 영아살해나 가업을 이을 수 없는 차남 이하 자식들을 대도시의 일용직 노동자로 쫓아내는 ‘자발적 인구조절’이 횡행했다. 겉보기엔 안온하고 평화로운 에도시대의 이면에는 이토록 잔인한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정체’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했던 게 바로 사무라이 계층이었다. 그나마 ‘자발적 인구조절’을 통한 긴축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백성(일본에서 백성은 어디까지나 농민만을 일컫는다)과 달리, 이들은 무조건 도시에 거주해야 했던 데다 체면 문제도 있었기에 씀씀이를 줄이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자연히 빛은 늘어만 갔지만, 대대손손 할 일이 정해져 있었던지라 상업에 뛰어들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무라이 계층을 괴롭게 했던 건 이들이 그 존재의의를 의심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었다. 본디 도쿠가와 막부는 병영국가의 성격이 강했고, 사무라이 역시 근본은 어디까지나 칼잡이였다. 그러나 200년 가까이 전쟁 없는 상태가 이어짐에 따라, ‘싸우는 자’인 사무라이의 존재는 누가 봐도 아이러니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은 잡다한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도시의 테크노크라트(書吏)로 변신을 꾀하긴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면 당연히 성에 찰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사무라이들을 다시 농촌으로 돌려보내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라도 확보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마저도 무위에 그쳤던 것이다.
이처럼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다름 아닌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었다. 본래 에도시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추종자를 불러 모았던 학문은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근대성의 맹아’로 추켜세워진 소라이학이었다. 하지만 이내 소라이학은 도덕을 업신여기는 무뢰배의 학문이라는 이유로, 무엇보다 국가의 최고결정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개돼지’로 여긴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아카데미컬한 문헌학으로 전락했다.
반면 만물에 내재하는 보편도덕인 ‘리(理)’를 근거로 누구든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하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다는 주자의 가르침은 소라이학에 비해 훨씬 매력적이었다. 때문에 주자학은 당시의 발달한 목판인쇄술에 힘입어 소라이학을 밀어내고 국학(國學)과 더불어 일본의 지배적인 사상적 조류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박훈이 ‘사대부적 정치문화’라 이름붙인 것이 특히 하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이를 에도 동북부에 위치한 미토번(水戶藩)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자.
(中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