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바람피다」와 「여자, 수절하다」, 「여자, 복수하다」
오랜 시간 잊혔으나 시간이 흐르며 다시금 널리 읽히는 책들이 있다. 최근엔 양귀자의 소설이 그렇다. 『모순』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2030 여성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우리 세대는 오랫동안 그를 『원미동 사람들』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었으나, 이제 양귀자라는 이름은 한국 여성주의 문학의 ‘오래된 미래’를 상징한다.
왜 하필 양귀자일까. 문학평론가 오혜진은 《한겨레》 이유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소설이 “페미니즘 대중화 현상을 통해 페미니즘 언어를 새롭게 만난 젊은 세대의 정서와 특별히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1990년대의 다른 여성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양귀자는 여성의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드문 작가”라는 것이다. 양귀자 소설 속의 여성들은 맹렬하게 저항하고, 거침없이 욕망하며, 주저없이 행동한다. 이런 과감함이 201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의 흐름과 공명하는 것일 터다.
양귀자 소설의 새삼스런 인기가 보여주듯, 여성의 욕망은 최근 페미니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다. 푸른역사의 “여자, 하다” 시리즈에 실린 적잖은 글들 역시 욕망하고, 증오하고, 행동하는 역사 속 여성을 다룬다. 이들은 딱히 선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고려 안정궁주는 남편을 두고 악공과 바람을 피웠다. 조선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은 궁궐 곳곳에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흉물을 묻어두었다. 18세기 함양 과부 박씨는 주도면밀한 계획 끝에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열녀가 되었다. 19세기 전주의 송씨 여인은 절굿공이로 전 남편을 때려죽였다.
바람 피고, 저주하고, 열녀가 되고, 살인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무엇보다 재미다. 고려 안정궁주의 간통 사건을 다룬 황향주의 「여자, 바람피다」를 읽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푸핫!”하고 웃음이 나왔다. “입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로 시작하는 도입부터 너무 강렬했다. 올 것이 왔다며 눈을 질끈 감는 안정궁주의 남편이자 피해자(?) 함녕백 박, 잔뜩 움추러든 그에게 대체 집안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며 노발대발하는 고려 명종의 모습이 너무 생생해 웹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언젠가 황향주가 웹소든 웹툰이든 웹드든 여하간 ’웹‘자 들어가는 무언가를 꼭 만들어주면 좋겠다.)
황향주의 글이 짜릿하다면, 이민정의 글은 서늘하다. 그가 쓴 「여자, 저주하다」는 인조의 후궁 조 귀인이 궁궐에 파묻어둔 온갖 흉물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무덤에서 파낸 썩은 관 조각, 사람의 뼛가루와 뼛조각, 어린아이의 팔뼈와 두개골, 강아지 대가리, 살이 모두 타버린 고양이 시체······ 하나씩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리털이 쭈뼛 솟는다. 원래 책에 실릴 삽화도 목 잘린 고양이 사체였다는데, 들어가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19세기 살인하는 여자들에 대한 한보람의 글은 통쾌하다. 절굿공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간통했다고 죽이고,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죽이고, 남편의 원수라고 죽이고······ 흔히 조선의 19세기는 찜통에서 죽어가는 개구리마냥 안온하게 쇠락하던 시기로 여겨지는데, 최소한 죽이는 덴 참 열심이었구나(?) 싶었달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욕망하고 거침없이 행동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깔깔대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한켠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 이렇게 웃어도 되나? 그래도 바람 피고, 저주하고, 살인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나마 판단이 쉽다, 그래도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니깐. 훨씬 곤란한 건 장지연의 「여자, 수절하다」에 실린 함양 과부 박 씨 이야기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폐병쟁이 남편과 결혼했다. 예상대로(?) 남편이 혼례만 겨우 치르고 세상을 떠나자 개가를 권하는 시부모의 말도 무시하고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른 뒤 독을 먹고 자결해 열녀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부 박 씨는 고상하게 말해 가부장제의 희생자고, 좀 더 천박하게 말하면 소위 “흉자”다. 그런 박 씨의 ’열녀 되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몇 년 전인 제20대 대선 전후, 웹툰 《치즈인더트랩》(이하 치인트)의 주인공 홍설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대선에서 윤석열을 찍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트위터에 소소하게 돌았던 적이 있다. 홍설이 연세대를 모델로 한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고,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가 ’무임승차자‘에 대한 분노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싶었다. 그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생일 테니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꾸릴 즈음 문재인 정부의 아파트값 폭등을 온몸으로 겪었을 테다. 능력주의를 내면화한 만큼 보수 정당의 구호에 훨씬 이끌렸을 것이고. 홍설이 윤석열에 투표했으리라는 가정은 퍽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
문화연구자 구자준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남성성을 모방하고 활용하는 홍설에 주목한다. 홍설은 자기계발, 아버지의 차별, 데이트폭력 등 온갖 위협에 시달린다. 이런 ’피곤함‘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같은 과 남자 선배인 유정을 모방한다. 유정은 모두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며, 삶의 모든 것을 ’자원화‘할 수 있는 냉정한 인물. 유정의 “초국적 비즈니스 남성성”은 정서적 과잉에 의존하던 기존의 남성성과 다르기에 여성인 홍설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상의 내용은 구자준, 「변화하는 남성성과 젠더 수행-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65, 2018)
홍설은 유정의 남성성을 모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여성적‘으로 규정하는 구조적 압력에서 벗어난다. 함양 과부 박 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모두 남성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승자가 된다. 장지연의 지적처럼 박 씨의 죽음은 “세심하게 준비한 자살의 의례”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언문(한글)으로 쓴 책을 읽으며 효녀와 열녀 이야기가 나오면 소리 높여 낭송하던 ’유교걸‘이었다. 당시 남성 사대부가 그러했듯 아전 집안 출신인 그녀에게도 고결하고 품위 있는 존재이고자 하는 명예욕이 있었다. 홍설과 박씨에게 어째서 남성성을 모방했냐고,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냐고 질문하는 건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 그들에게 주어진 방법이 그것뿐이었으므로.
때로 여성은 남성의 논리를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뒤집거나 비틀기도 한다. 한보람의 글 속 살인하는 여성들은 법정에서 효를 위해, 의를 위해 죽였다고 호소했다. 그간 유교 질서 아래에서 여성에게 요구된 덕목이 오로지 열(烈)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변화였다. 이들은 소수의 일탈적이고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었다. 소진형에 따르면 조선 후기 널리 읽힌 여성영웅소설에선 남성보다 더 남성답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남장여성들이 등장한다. 비록 남장을 했을지언정 이들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충‘을 실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소진형, 「열녀 :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중화와 여성의 욕망」, 『한국정치학회보』 54, 2020)
이송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 후기 ’여성영웅‘에 대한 상상이 근대적 ’애국부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분과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충을 실현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열망이 근대에 이르러 ’애국하는 여성‘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충이 윤리적 인정투쟁에 머물렀다면, 신소설의 ’애국부인‘은 픽션의 형태로나마 ’애국‘이라는 공적 덕목에 헌신한다. (이송희, 「의와 충의 이중주: 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여성영웅형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여성윤리주체의 확대」, 『어문연구』 197, 2023) 그렇다면 이들은 유교 질서에 순응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한 것인가? 아니, 순응과 극복이라는 프레임으로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 전 희극인이자 유튜버인 강유미의 “중년남미새” 영상이 엄청난 화제와 논란을 불러온 적이 있다. 대놓고 남성 직원을 편애하는 것을 넘어 끝내 그에게 성애적 감정을 드러내는 ’아들맘‘에 대한 묘사가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일까, 유튜브 댓글창이 불타고 기사와 평론까지 여럿 작성되었다. 한편에선 학창 시절 남성 청소년들의 노골적인 성추행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고, 다른 한편에선 남미새 프레임 역시 여성혐오라며 영상 속 ’아들맘‘ 묘사를 문제 삼았다. 오만 공간에서 온갖 이야기가 오갔지만, 사람들이 왜 이리 ’뜨겁게‘ 반응하는지, 영상이 보여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비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어도 내게 “중년남미새” 논란은 아직까지 한국 사회가 여성의 욕망과 실천을 정교하게 이해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물론 주로 문화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소설과 웹툰, 드라마 속 여성의 욕망과 실천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미 적지 않다. 다만 이런 분석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서 멈춰버리고 만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물론 이는 연구자보다는 이들이 다루는 작품의 한계다. 구자준에 따르면 “초국적 비즈니스 남성성”을 재현함으로써 유정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는 홍설의 노력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자신과 같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홍설의 모습에 유정이 두려움을 느끼고, 솔직한 성찰과 반성으로 ’성급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과 위기는 로맨스를 통해 봉합된다. 오혜진 역시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능력주의와 금융 투기를 기꺼이 ’선택한‘ 엘리트 여성의 곤경을 지적한다. (오혜진,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한국 여성문학·퀴어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
소설과 웹툰, 드라마가 멈춰 선 자리에서 역사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치인트 홍설은 윤석열을 찍었을까?”라는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대답해야 할까? 역사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그나마 잘하는 일 중 하나는 성실히 자료를 모음으로써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명예욕과 성취욕, 질투심과 생존 본능, 성애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다종다양한 욕망은 당대의 규범과 어떻게 마주했는가? 열에 열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조건 가운데서 여성은 어떻게 전략을 세우고, 선택을 내렸으며, 행동에 나섰는가? 그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강고한 질서는 어떻게 뒤집히거나 틈을 내주었는가? 역사학이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중년남미새”든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든 여성의 욕망과 실천을 지금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리라 믿는다. “여자, 하다” 시리즈는 이를 위한 작지만 중요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