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Jun 15.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20  - 유월 풍경

꽃양귀비가 너무 많다. 장미 넝쿨 사이에서도 보이고 가지 아래에도 보인다. 그만 질리려고 한다. 사그라들기 시작한 상사화 이파리가 보기 싫어서 며칠 끌탕을 하다가 기어이 잘라버렸다. 작년에도 누렇게 변해서 쓰러진 그 잎들을 외면하다 못해 미리 잘랐더니 그 많은 뿌리에서 꽃은 딱 한 송이만 올라왔었다. 그때 미안했던 마음이 미처 올라오지 못한 꽃대들만큼이나 많아서 서러웠던 기억이 여태 생생하지만 상사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잘랐다. 그대로 두고 기다리면 꽃은 제법 볼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상하고 곪을 내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하루도 한 시간도 내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점점 견디기 어렵다. 이렇게 모질고, 너그럽지 않고, 욕심 많고, 심술쟁이인 걸 몰랐다면 그대 나를 떠나도 좋아요.



작년 봄에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작은 콩나물시루 하나를 샀었다. 쥐눈이콩을 얻어다가 물에 불려 시루에 얹고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었다. 콩나물은 제대로 자라주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작은 콩알에 뿌리가 나서 하얗고 통통하게 자라는 것을 지켜볼 시간과 마음이 부족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콩나물은 그런 내가 마음에 안 들었고 나는 또 그런 콩나물과 내 여유 없음이 노여워서 싱크 안쪽 잘 안 보이는 곳에 밀어 넣고 말았다. 어제 작은 종지 하나를 찾다가 잊고 있던 콩나물시루를 보았다. 시루의 작은 구멍들에 유월의 마당을 담아보고자 했으나 시루는 너무 작았다. 너무 일찍 피어버린 코스모스와 캄파눌라, 장미, 찔레, 으아리, 삼색제비꽃, 꽃양귀비, 블루베리와 토마토 잎을 담았다. 저 깊고 푸른 초록의 숲으로 걸어들어가면 잃어버린 모로와 유카를 만날 수 있을까? 뻐꾸기가 아침부터 요란하게 운다. 



제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매실청을 담고 딸기잼을 만들고 복분자를 따는 일 같은 것, 길게 보면 아마 우리 삶에도 제때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학교 가는 일, 밤을 잊고 공부를 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일, 꿈을 꾸고 이야기하고 친구를 만나는 일 조차도 아마 그럴 것이다. 오월 마지막 날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가능한 날짜 서너 개를 보내왔었다. 나는 대답을 못한 채 그날들을 다 보내버렸다. 친구는 대답 없는 나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답을 못할 이유가 있거나 집에서 나오기 싫거나 아니면 자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겠지. 복더위에 수틀을 매던 서희의 심정을 그녀는 잘 알고 있으니.



꽃이 시들기 전에 식탁에 올려두었다. 엄마가 만들어 보내신 콩물에 소면을 말았다. 이층 발코니에서 자란 오이를 썰어 한편에 담은 점심. 



유월의 절반이 싹둑 잘려나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사랑하는 생활 19 - 오월 마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