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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글 읽기
by 단어벌레 Jun 26. 2017

그날들 -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

윌리 로니스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정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면 그것에 감사하자.
내가 '의외의 기쁨'이라 명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에 꽂은 핀처럼 사소한 상황들.
바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늘 준비해야 한다.
윌리 로니스  '그날들'  pp 89~90



윌리 로니스의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찻집, 어쩌다 마주친 풍경과 그 속의 사람들, 기적처럼 비추는 햇살 속에 열망과 기대, 꿈, 나른함, 지루함, 흥분, 자유와 포기와 무심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윌리 로니스의 카메라 앞에서 행복을 연기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행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의 한 형태라는 걸 절로 알게 되고 만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오늘을 담보로 맡기듯이 포기할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매 순간마다 집중할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볼 것. 그리고 가능하면 기록할 것. 글이든 사진이든.




물론 먼 훗날에 오늘 메밀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걸 기억해내고 '아, 그때 먹었던 메밀국수는 정말 훌륭했어. 그래. 그 국수를 먹으면서 나는 정말 행복했구나'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가쓰오부시를 넣어 멘쯔유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식혀두고,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무를 강판에 갈고, 김을 굽고 파를 다지고 알람을 맞춰 국수를 삶는 일을 마친 후에야 만든 한 그릇의 메밀국수. 물론 멘쯔유는 남았지만 후루룩거리며 국수를 먹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십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훗날 내가 기억하는 행복은 국수를 만들던 때일까? 아니면 국수를 먹던 때일까?



언제부턴가 주방에서 일을 할 때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생각들을 소리 내어 말해버렸다. 아무도 없었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기를 거듭하다가 생각하기와 말하기 사이에 단계가 하나 더 있는 걸 알았다. 감정도 언어도 한번 더 순화가 되는 것이다. 생각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단어들이 소리 내어 말하고 나면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반대로 더 격화되기도 한다. 그저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화가 나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둘 다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는데 도움이 된다. 아마 우리 집 주방의 벽들은 내게 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어두운 밤이면 쑥덕공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웃기도 하고 흉도 보겠지.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하기야 벽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방법이 없으니 안되려나.



사진기를 가까이 두고 지낸다.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게 잡아둔 순간들 중 훗날 행복이란 이름표를 달 수 있는 것들은 어느 정도나 될까. 잘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가능하면 놓치지 않도록. 행복이란 기억은 소중한 것이니까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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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직업출간작가
전업주부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사소하나 놓칠 수 없는 순간들, 덧없어서 아름다운 것들, 일상에서 건져올린 깨달음과 기쁨들의 부피와 무게에 마음을 담아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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