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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08.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21 - 순간들

                                                                                                                                                                                                                                                                                                 

블루베리는 신기하다. 종 모양의 하얀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연둣빛 작은 열매들이 생기는데 보랏빛으로 물들 때까지는 새침데기다. 절대로 그 연두색 작은 몸을 부풀리거나 색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이 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두색을 버리고 몸을 부풀린다. 마치 자기는 본래 보라색이었던 것처럼, 한 번도 하얀 종 모양의 꽃이었던 적이 없던 것처럼, 더군다나 푸른빛을 띤 연두색이라니요 하면서 앙큼을 떤다. 나는 15년이 훌쩍 넘는 커다란 블루베리 나무를 두 그루 가지고 있다.



블루베리가 넉넉한 요즘에는 아침에 바가지를 들고나가면 제법 많은 양을 딸 수 있다. 아침 식탁에 라즈베리와 복분자와 함께 섞어 올리기도 하고, 다른 과일이나 야채들과 섞어 주스를 만들기도 한다. 먹는 속도보다 익는 속도가 빨라서 열매가 모이면 잼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머핀 만들기다. '타샤의 식탁'에 로비의 블루베리 머핀 굽는 이야기가 나온다. 작은 야생 블루베리가 머핀 굽기에 좋다는 이야기부터 로비의 곱슬머리에 새가 날아와 앉고 머핀을 담은 수레를 끌고 교회에 간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요리책인지 동화책인지. 머핀을 굽는 방법 또한 무수히 많지만 나는 버터와 설탕을 듬뿍 넣은 타샤 할머니의 머핀을 제일 좋아한다. 머리 저쪽 한구석에서 칼로리 걱정이 조금이라도 솟아오르려고 하면 소리 내어 말해버리고 만다. '세상은 넓고 걱정거리는 넘쳐나는데 칼로리 걱정까지 더할 필요는 없지!' 매운 건 맵게, 짜고 단 것은 그만큼 짜고 달게 만든다. 건강을 생각해서 버터 대신 올리브유를 넣고 설탕 없이 빵을 굽고 잼을 만드는 건 한 번씩 해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제맛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


올해 바질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쑥쑥 자라나지 않아 화분들을 살펴보니 흙이 포실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 끝에 주방 창문 아래의 바질들은 모두 정리하고 데크 위의 화분들에 심은 것들만 남겼다. 바질 잎과 구운 잣, 싱싱한 마늘, 올리브유를 넣고 올해의 첫 바질 페스토를 만들었다.


이웃집과의 경계에 살다가 그만 집 밖으로 쫓겨난 베르가못이 붉게 피었다. 가로지른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색이 곱다. 남편은 해마다 유칼립투스 묘목을 산다. 봄에 집에 와서 가을까지 제법 자란 아이들을 집안으로 옮겨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이른 봄이면 멀쩡하던 식물들이 병이 들거나 말라서 죽는 일이 생긴다. 올봄엔 유칼립투스가 그랬다. 겨울 잘 지나고 봄에 죽어버리는 식물이라니! 올해도 순무를 심었다. 동그랗고 통통한 순무를 두껍게 썰어서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굽는다. 가장자리가 투명하게 변하면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접시에 올린다. 달콤한 즙이 순수한 기쁨을 주는 순무조각을 한 입 깨물 때마다 차가운 맥주 생각이 난다. 하늘이는 여름이 무서운 아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원한 그늘을 찾아다닌다. 작년만큼 고생이 심한 여름이 없었는지라 무더위가 오는 게 걱정스러웠지만 아직은 잘 견디고 있다. 


무수히 많은 터널을 지나서 부산에 다녀왔다. 저 앞에 터널이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터널에서 나가는 순간을 기대한다. 길건 짧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가는 건 좋다. 소설 '설국'을 처음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 첫 문장을 떠올린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수십 개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그때마다 '설국'을 떠올리는 이 집요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 지금은 여름이라 눈이 있을 리 없는데도 초록 색의 숲을 마주하면서도 '눈의 고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라니!



방울 토마토의 껍질을 벗겨서 피클을 만들었다. 바질 페스토에 버무린 파스타와 토마토 피클은 어제의 점심. 지금은 새벽 2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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