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당
마당이 제일 어여쁜 건 오뉴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한 해가 다 간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나는 이제 이해한다.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리면 꽃잎은 멍이 들고 잎과 줄기가 녹아내리는 식물들이 생긴다. 장미 잎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것도 그 즈음이고 종소리가 들릴 것 같은 캄파눌라가 사그라지는 것도, 제철을 만난 잡풀들이 마당을 점령하는 것도 그때다. 장마전선이 물러나면 무사히 우기를 건넌 식물들도 고개를 외로 꼬고 힘든 태를 낸다. 화분을 그늘로 옮기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어도 시든 잎과 늘어진 줄기로 힘들다고 말할 줄 아는 종류들은 그나마 낫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맞는다는 걸 실감하는 때이기도 하다. 뜨겁고 목말라도 아닌 척, 괜찮은 척하던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올해는 유칼립투스다. 정신 차려보니 봄이 와 있더란 말, 벌써 여름인가 하는 말도 사실은 눈여겨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은 내 탓이다. 마음먹으면 또각또각, 뚜벅뚜벅 계절이 가고 오는 소리가 들리고 두툼했던 초록 잎에 노란빛이 더해지고 얇아지는 걸 놓칠 수 없다. 가을이 왔다.
이사 온 다음 해 방울토마토는 마치 숲처럼 무성했다. 토마토 순을 잘라 줘야 한다는 것도 몇 해가 지난 후에야 알았으니 그때는 가지가 뻗어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뿌듯했다. 토마토 잎을 만지면 풋풋한 냄새가 났는데 그게 얼마나 좋았던지 눈이 절로 감겼던 여름이었다. 무성한 줄기들을 헤치고 구슬 같은 토마토를 따서 놀았다. 어쩌다 하루 놓치면 덤불 아래 떨어진 토마토가 뒹굴었는데 그게 얼마나 아깝던지. 너무 욕심을 부렸을까, 그 다음 해부터 토마토는 계속 실패였다. 올해 자리를 옮겨 두 포기를 심었더니 오랜만에 풍년이다. 그동안 아이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남편은 은퇴했으며 농익은 토마토를 좋아했던 바람이가 떠났다. 나는 토마토 잎에서 나는 냄새를 담은 향초가 판매된다는 걸 새로 알게 되었는데 마치 소중하게 여겼던 걸 도둑맞은 것처럼 허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얘기를 차마 못하던 날들이 있었다. 올해는 장마 전의 마당만큼이나 뙤약볕으로 달구어진 마당에도 매혹되었다. 그 마당에 오늘도 빨래를 널어 말리다가 아, 가을이다 싶었다.
덩굴식물의 생명력을 닮고 싶다. 겨울에 메마르고 갈라진 머루 나무 둥치를 보면 그 안에 초록이 숨어있을 것이란 걸 상상하기 어렵다. 동그랗게 말린 갈색빛으로 세상에 나온 순은 순식간에 뻗어나 겨우내 헐벗었던 파고라를 덮는다. 떼어난 잎은 홀로 빛나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지만 줄기에 붙어 바람에 날리는 잎은 반짝이며 투명하고 하늘거린다. 고개를 들어 머루 잎들이 만들어낸 풍경을 보는 일은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과 닮았다. 몇 년 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산문집 <백화점>의 작가, 조경란이 <소설가의 사물>에서 말한 대로 "책상 서랍에 만화경 같은 게 하나쯤 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조금은 사치스럽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컬러풀한 무늬와 형상에 한눈을 팔아보고 싶을 때가" 내게도 있는 모양이다. 그는 "어쩌면 내가 어떤 것을 만들고 지었을 때,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거기에 잠시 아름다움 같은 게 깃들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에 고유한 아름다움이 깃들어있을 거란 생각으로 산다. 내가 건너가고 있거나 마주할 계절, 지나치는 거리와 사람들을 어떻게 들여다볼지 벅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토마토 덩굴은 머지않아 걷어내야 할 것이고 머루의 이파리들도 곧 떨어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