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좀 참아. 다들 그렇게 살아."
살면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 거역할 수 없기에 침묵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복기하게 되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사회에 나와서는 상사가, 결혼 후에는 나 스스로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참으면 편해진다고, 참아야 관계가 유지된다고 내면의 또다른 나에게 하루에도 열두번 더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참는다고 마음이 편해진 적이 있었던가.
나는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상대가 불편할까 봐, 분위기를 깰까 봐,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항상 입에 붙었다. 그 말 뒤에는 늘 작고 조용한 한숨이 따라왔다.
첫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학부모위원을 부탁받았다. 그때도 거절하지 못했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며 운영위원회에 참석하고, 행사마다 발 벗고 나섰다. 그런데 돌아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감투를 좋아하나 봐." 그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초등학교에서도 대표를 맡아 3년을 보냈다. 일을 잘해도, 못해도, 뒷말은 늘 따랐다. 그제야 알았다. 아무리 잘 참아도, 오해는 피할 수 없다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참을수록 병들고, 아무도 나를 헤아려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너졌다. 그러면 마음의 문이 닫히고, 점점 사람을 피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하게 되기도 했다. 차라리 그게 더 편하니까.
그 병은 타인이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침묵의 병이었다.
법정 스님은 말씀이 나를 위로해줬다.
"참을 인(忍) 자는 칼날 인(刃)이 마음 심(心) 위에 얹힌 글자다."
참는다는 건 마음 위에 칼을 올려두는 일이다. 겉으로는 괜찮은 듯 웃고 있지만, 속에서는 상처가 깊어진다는 의미다.
아이를 키우며 그때의 내가 자주 떠오른다. 엄마가 된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을 아이가 겪지 않게 하려는 마음으로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먼저 걱정하고 잔소리를 쏟아낼 때가 있다.
"그렇게 하면 친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조심해야 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사실은 그 모든 말 뒤에 이렇게 숨겨진 마음이 있다.
'나는 예전에 그러지 못했거든. 너만은 다르게 살았으면 해서 그래.'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잔소리가 '사랑'이 아니라 '억압'처럼 들릴 때가 있겠지. 나는 내 상처를 막으려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다치게 했던 건 아닐까.
공자는 말했다.
"진실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진심이 빠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와의 관계도, 타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나는 참는 걸 미덕이라 여겼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참는다고 평화가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나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은 참기보다 '표현하기'를 연습한다. 말이 어렵다면 문자나 편지로라도 써본다. 말로는 막히던 마음이 글로는 흐르기 때문이다.
처음엔 서툴고 어색하지만, 한 번 써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내가 원하는 걸 표현하는 건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용기라는 걸 이제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어제 저녁,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왜 맨날 참으라고만 해?"
순간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엄마도… 그렇게 배워서."
그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참았을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였다. 거절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까 봐. 내 의견을 말하면 관계가 틀어질까 봐. 결국 타인의 시선이 나보다 중요했던 거다.
그럼 참으면 정말 관계가 유지되던가?
아니었다. 오히려 참을수록 진심은 묻혔고, 나는 점점 투명인간처럼 사라졌다. 관계는 유지됐을지 몰라도, 그 안에 진짜 '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이에게 "그냥 참아"라고 말하려던 순간, 문득 멈칫했을 때.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려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착한 사람보다, 진심이 편한 사람으로. '괜찮아요' 대신 '사실 좀 힘들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참지 않아도 괜찮다고, 네 마음을 말해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이 어렵다고 반복하다보면 차차 변화할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참는다고 평화가 오는 게 아니다.
말해야 비로소 마음이 산다.
Sonnet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