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가장 빛나는 덕목, 측은지심(惻隱之心)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

by 무딘날

인간으로서 가장 빛날 수 있는 덕목,

측은지심(惻隱之心)


<귀멸의 칼날>은 기존 소년만화 장르의 인간찬가에 대한 관습적 경계를 넘어, 측은지심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을 바라본다. 원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이 캐릭터와 서사,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존재하고, 그래서 미디어믹스 작품들은 좋아하면서도 원작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평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필자는 일부 아쉬움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원작 자체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있어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밑바탕을 두고 글을 작성하였다.




이 작품이 성취한 가장 특별한 지점은 ‘무한한 유한’과 ‘유한한 무한’이라는 역설적 구도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아름답다’라는, 어찌 보면 인간의 죽음을 포장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그 말을 이 작품은 ‘귀살대’와 ‘혈귀’라는 아주 단순한 구도로 표현한다. 표면적으로는 ‘복수극’의 구도를 갖기에 보편적 정서를 바탕으로 작품 속에 몰입하도록 만들지만, 그 속에는 복잡다단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단면을 세심하게 담아낸다. 그렇게 보편적인 정서와 개별적인 정서의 공존 속에서 역설이 촉발된다.


그 세심함은 누군가에게는 참 하잘 없는 것들로 비춰질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조명한다. 주변 사람에 대한 끊임 없는 질투, 부족해보이는 사랑에 대한 갈구, 스스로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며 끓어오르는 열등감과 불안, 노력해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 허무, 과거에 대한 때늦은 회한, 죄책감, 영원처럼 느껴졌던 한 순간에 사로잡힌 오만... 따져보면 왜 이리도 작은 것에 분개하고 마는가 생각이 드는, 참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감정들이다.


작가는 인간 찬가를 그려내고자 하면서도, 인간의 원초적인 ’찌질함‘을 짙게 묘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쓰레기 같은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가득한 곳에서 우리 인간은 대체 스스로 어떤 방향으로 향해가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는 ’탄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 측은지심을 느끼는가? 누군가는 측은지심이란 자신이 타인보다 어떤 측면에서든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나타난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연민'은 도달하는 과정의 결이 그와는 전혀 다르다. 측은지심의 근원은 '자신의 현재에 대한 무한한 감사'이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측은지심'이란 그렇다.


탄지로는 화려한 귀살대 대원으로서 귀살대의 기둥인 '주'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까지 올라서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여동생인 네즈코와 원래 살던 산골자기 마을에서 소박하게 아웅다웅 사는 것이다. 그가 혈귀가 되어 인간들을 도륙하는 존재들에게마저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연민을 표하는 까닭은, 그저 마음 여린 소년이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감사함을 표하는 현재를 갖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사죄이다.


누구나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지금의 나를 인식한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 거기서 우리들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슬쩍 느끼고서도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한, 그런 감정. 하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감정. 그것은 내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내 삶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 가득찬 추악한 인간이여서가 아니다. 인간이란 남을 통해서만 나를 직시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여서 자연스레 그리 되는 것이다. 그저 그 뿐이다.


인간은 왜 이토록 편협하고 찌질하기 그지 없는데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위대함의 근원이 무엇일까. 위대함의 근원은, 내가 위대하지 못 한 존재라는 것을 남을 통해서 인지하고,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 '지금'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인간은 그 마음을 기점으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되고, 비로소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연민을 갖출 수 있다.


언제나 나의 현재를 긍정하고 감사할 수 있는 '강함'은 누군가와의 우위를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그런 형태로 얻어진 강함은 또다른 우열관계를 만나 쉬이 무너진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한 강함은 '표면적인 우위'가 아닌 '감정의 교차'를 통해 그려진다. 탄지로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다못해 그 대상이 도깨비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품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만화적으로는 감정의 냄새를 맡는다고 표현되어 있는 이 부분은, 진득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혹은 이해하기 싫고 역겹기까지한 수많은 이들의 감정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마주하는 주인공 탄지로의 강함을 보여준다. 그 교차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나의 감정도 제대로 직시할 수 있고, 한발짝 나아가 평행선처럼 보이는 타인들과 접할 수 있어진다는 것을 작가는 수많은 장면들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고립된다. 누군가와 함께 살더라도 함께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혈귀'란 바로 그 고립을 상징한다. 오로지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고, 나만 잘나면 되고, 나만 성장해서 남들과 달라지겠다는 혈귀들의 자아 흐름은 철저히 자신을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킨다. 혈귀들이 구가하는 시간이 본디 '잠'의 형태로 인간이 자발적인 고립을 취하는 시간인 것처럼, 사회와 분리되어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나 자신'에만 사로잡혀버린 애처로운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들이 이루고 있는 조직도 사실은 조직이 아니다. '키부츠지 무잔'이라는 우월한 하나의 모체 아래 복속되어 있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단순한 변덕에 의해 한 순간에 추풍낙엽처럼 사라져 간 하현 무리들처럼,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대조적인 존재들의 대립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유한함에 무한한 호흡을 불어넣는다. 작품 속 귀살대가 사용하는 ‘호흡’은 단순한 전투 기술이 아닌, 유한한 생명이 가장 찬란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지속’을 보여주며, 한 명의 호흡이 멈추었을 때 동료가 그 뒤를 잇는 ‘연결’의 연출은 개별적 유한성을 극복하는 공동체의 무한한 의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반면, 영생을 얻은 혈귀들은 역설적으로 과거의 트라우마라는 순간에 갇혀, 정체된 자아를 위태롭게 부여잡고만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를 보면 사실 ‘혈귀’라는 존재는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라, 고작 한 인간의 세월 중 한 순간만을 잘라놓은 단면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간 본연의 연민을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는 '탄지로'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개별적인 유한한 생명들이 영속적인 가치를 빚어낸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은 혈귀들의 ‘정체된 영원’과 귀살대의 ‘계승되는 유한’ 사이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측은지심을 잃어버린 자들의 비극과 그것을 지켜낸 자들의 숭고함을 조명하는 한 편의 거대한 인간 찬가로 거듭난다.




무한성이라는 공간의 시각적 구현은 혈귀들의 뒤틀린 내면세계를 물리적으로 펼쳐놓은 하나의 거대한 미장센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비현실적인 구조물들은 출구 없는 과거의 상처에 영원히 갇혀버린, 인간을 벗어난 존재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하나의 장면은 그 자체로 무한하지만, 결국 하나의 프레임 내에 갇혀 있기에 지극히 유한하다. 무한과 유한이 교차하는 그 프레임의 굴레에서 끊임없이 뒤틀어지는 구조물들은 결국 명백한 유한함을 숨기기 위한 겉치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번 작품에서 진 주인공처럼 그려진 상현의 3 '아카자'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인간 시절의 무력감에 정체되어버린 존재이다. 그 결과 강함을 추구했던 본래의 이유, 즉 타인을 지키고자 했던 측은지심을 망각한 채 목적 없는 투쟁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결국 범죄자로만 간신히 살아갈 수 있던 자신이 측은지심으로 바라봤던 존재를 상기시키며 그 끝을 맺는다. 서로를 연민하며 지탱하던 다유 상현 남매가 두 사람의 목을 함께 베어내야만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아카자는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회복하고서야 공허한 무한을 끊어낼 수 있게 된다. 지독한 자기혐오로 점철되어 순간의 족쇄에 끌려다니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유한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되찾는다.


이후 3부작 중 나머지 작품들을 통해서 마저 그려지겠지만, 다른 상현 도깨비들도 이와 일맥상통한 과정에서 그려진다. 혈귀들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성장의 가능성과 미래를 향한 역동성을 완전히 상실해있다. 불멸이 새로운 경지로 도달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집착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그 순간만을 곱씹고, 아무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된다. 그리고 자신의 단절됨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를 연민하며 스러져간다.


이러한 도깨비들의 정체된 영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바로 귀살대의 유한한 삶이다. 그들의 힘의 원천인 ‘전집중 호흡’의 시각적 연출은, 한정된 생명력을 가장 찬란하게 불태우는 순간의 미학을 담고 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끊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호흡의 흐름은, 그들의 싸움을 숭고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무한성 전투에서 동료의 죽음은 끝이 아닌, 계승되어야 할 의지의 시작으로 그려진다. 렌고쿠 쿄쥬로의 유산은 그의 유한한 생명이 어떻게 타인의 삶 속에서 무한히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무잔을 비롯한 상현들과의 싸움에서 이 '연결'과 '계승'이 승리의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되는 서사는, 한 사람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 다른 이가 그 의지를 이어받아 더욱 강하게 타오르는 인간의 강함을 보여준다. 개개인의 유한한 호흡이 천 년에 걸쳐 이어지고 파생되며 ‘인간을 지키겠다’는 거대한 집합의식으로 자리잡고, 그것으로부터 얻게 되는 무한한 생명력은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고통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모든 유한한 생명들의 의지를 하나로 묶어 무한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이다. 그의 서사는 개인의 복수심을 넘어 인간과 도깨비 모두의 슬픔을 끌어안는 보편적 연민으로 확장된다. 탄지로가 보여주는 공감은 그가 휘두르는 검보다 강력한 무기이며, 악마의 목을 베면서도 그들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이 작품의 핵심 철학을 드러낸다.


아버지, 또 그 위로는 조상님과 호흡의 선조인 요리이치로부터 계승된 히노카미 카구라는 수많은 선조들의 유한한 삶과 의지가 탄지로의 몸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무한하게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차후에 나오는 설정이지만, 히노카미 카구라의 12개의 춤사위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며 '반복'으로써 존재하는 것 또한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는 진정한 불멸성이란 '나 혼자'라는 고립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측은지심을 갖고 서로를 보듬고 사랑함으로써 깃드는, 살아 숨 쉬는 정신과 의지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은 인간의 나약함과 유한성을 처절하게 직시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연민을 통해 간신히 연결되어가는 의지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비롯된다고 역설한다. 자신의 유한함을 거부한 도깨비들은 의미 없는 영겁의 감옥에 갇혔지만, 자신의 유한함을 끌어안은 귀살대는 측은지심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고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무한한 의지를 만들어낸다.


휘두르는 칼끝 사이로 간절하게 오가는 인간들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에 모든 순간이 절실하고 찬란하다. 상처받지 않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닌, 유한한 삶의 고통 속에서도 측은지심을 잃지 않는 용기를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비루함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사소한 무한함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고립되지 않고 연결되려고 하는 인간에 대한 장대한 찬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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