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 많이 풀려서 환율이 오르고 휴짓조각이 된다?

유동성에 대한 오해, 한국은행 통화지표 개편의 시사점

by 무딘날

최근 각종 커뮤니티와 언론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화두는 단연 '원화 가치 하락(환율 상승)'과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유동성 과잉' 프레임이다.


시중에 풀린 돈을 의미하는 광의통화(M2)가 전년 동월 대비 8%대 증가율을 기록하며 '역대급 팽창'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이 그 근거다. 넘쳐나는 원화 유동성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현재의 경제 불안을 낳고 있다는 논리다.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이 주장은 대중의 불안을 쉽게 파고든다. 하지만 시장의 펀더멘털과 이면의 자본 흐름을 짚어보면, 이는 낡은 통계가 빚어낸 전형적인 '통계적 착시'에 불과하다. 한국은행의 최근 통화 및 유동성 통계 개편 결과는 이러한 '유동성 폭발론'이 얼마나 허술한 논리인지 명확히 증명한다.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은 언론이 기계적으로 인용하는 '8.7%'라는 수치의 실체다. 한국은행은 2025년 12월, IMF 매뉴얼 개정과 금융시장 구조 변화를 반영해 통계 편제 방식을 전면 개편했다. 2025년 10월 기준으로 구(舊) 방식을 적용하면 M2 잔액은 4,466.3조 원, 증가율은 8.7%가 맞다. 그러나 새로운 기준을 적용한 신(新) M2 잔액은 4,056.8조 원으로 무려 409.5조 원(9.2%)이나 급감한다.


핵심은 증가율의 변화다. 신 기준을 적용하면 M2 증가율은 5.2%로 뚝 떨어진다. 2005년 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20년간의 M2 장기평균 증가율이 7.5%라는 점을 고려하면, 5.2%는 '역대급 팽창'은커녕 오히려 장기 평균을 크게 밑도는 수치다. 나아가 경제 규모 대비 통화량을 나타내는 신 기준M2/GDP 비율 역시 2024년 1분기 이후 장기 추세치를 지속적으로 맴돌거나 밑돌고 있다. 시중에 돈이 풀려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화 공급 증가세가 둔화하며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구 통계와 신 통계 사이에 이토록 극단적인 괴리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국내 자본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ETF(상장지수펀드) 등 '수익증권'의 독특한 성격과 이를 통계에 반영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행은 이번 개편을 통해 주식형·채권형 펀드와 ETF를 아우르는 수익증권(Non-MMF 지분)을 M2 항목에서 전면 제외했다. 통화란 본디 일반적인 지급 수단으로 쓰이거나 액면 가치 손실 없이 즉각 결제에 동원될 수 있는 안정적 가치저장 수단이어야 한다. 과거 통계에서는 펀드나 ETF도 M2로 묶였지만, 한국 금융시장에서 ETF는 현금성 대기 자금이라기보다 가격 변동성을 감수하며 수익을 좇는 위험 자산, 즉 '투자' 성격이 압도적으로 짙다.


주식 시장이 호황을 맞아 가계와 기업 자금이 펀드와 ETF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고 가정해 보자. 당장 실물 경제에서 빵을 사고 월급을 줄 수 있는 결제성 현금이 늘어난 것이 아님에도, 구 기준에서는 단순히 펀드 규모가 커졌다는 이유로 M2 통화량이 폭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중앙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지 않았음에도 시중에 유동성이 범람하는 듯한 심각한 착시를 부른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가격 변동성이 큰 수익증권을 M2에서 제외한 조치는 이처럼 투자 자산이 통화 지표를 교란하는 현상을 막고, 실질적 구매력을 지닌 '진짜 돈'의 흐름만 발라내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이 조치 하나로 2025년 10월 신 M2 통계에서 떨어져 나간 금액만 무려 497.1조 원에 달한다. 우리가 '유동성 폭발'이라 굳게 믿었던 덩어리의 상당 부분은 주식판과 채권판을 부유하는 투자 자산의 그림자였던 셈이다.


물론 M2에서 500조 원 가까운 자본이 빠져나갔다고 그 돈이 세상에서 증발한 것은 아니다. M2를 품고 있는 더 넓은 범위의 유동성 지표를 살피면 통화 총량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M2에서 제외된 만기 2년 미만 수익증권은 한 단계 상위 개념인 '금융기관 유동성(Lf)' 항목으로 고스란히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25년 10월 기준 신 Lf 잔액은 6,011.4조 원으로, 구 Lf(6,026.3조 원)와 비교해 불과 14.9조 원(0.2%) 감소하는 데 그쳤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지표인 '광의 유동성(L)' 잔액 역시 7,597.1조 원으로 구 기준(7,543.2조 원) 대비 0.7%(53.8조 원) 증가했을 뿐이다.


결국 대한민국 거시경제를 감싸고 있는 거대 유동성의 총량 자체는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도, 극단적으로 줄지도 않았다. 그저 결제성 통화와 투자성 금융상품을 가르는 칸막이가 국제 현실에 맞춰 보다 정교하게 재배치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데이터를 종합하면, 근래 언론과 커뮤니티가 원화 가치 하락의 주범으로 '내수 시장 과잉 유동성(M2 8.7% 폭증)'을 지목하는 것은 명백한 진단 오류다.


실제 M2 증가율이 5.2%로 장기 평균조차 밑도는 상황이라면, 원화 약세의 진짜 원인은 내부의 과도한 '돈 풀기'가 아니라 거시 경제의 구조적 결함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현재의 두드러지는 원화 약세는 대외 환경 변화에 취약한 산업 구조, 개인 중심의 구성으로 변동성이 너무 큰 자본시장, 좁혀지지 않는 한미 금리 격차가 빚어낸 자본 유출 압력, 기업들의 후진적 지배구조가 야기한 고질적 '코리아 디스카운트'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로 보아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상품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기업과 가계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경로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진다.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인 헤드라인 수치에 매몰되어 "돈 복사기가 돌아 화폐가 휴짓조각이 된다"는 식의 일차원적이고 선동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오히려 이번 개편으로 기타금융기관이 연금기금, 보험기관 등 6개 업권으로 정교하게 세분화된 만큼, 이질적인 금융 주체들이 어떻게 자금을 빨아들이고 기업에 신용을 공급하는지 세밀하게 해부해야 할 시점이다. 허상에 불과한 유동성 공포를 걷어내고, 시장의 실체적 진실과 자본 생산성을 꿰뚫어 보는 입체적 통찰이 절실하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보자. 8.7%라는 M2 증가율의 허상을 걷어낸 자리에 남겨진 한국 경제의 진짜 민낯은 과연 무엇일까? 시중에 돈이 넘쳐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인플레이션 호황기가 아니라, 오히려 돈이 실물 경제로 돌지 못한 채 고여 썩어가는 '유동성 함정'에 훨씬 가깝다. 나아가 천문학적인 가계 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라는 시한폭탄 탓에 중앙은행조차 금리를 제멋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구조적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전통적인 경제학 교과서에서 유동성 함정은 '경제 주체들이 돈을 쓰지 않고 현금만 쌓아두는 현상'으로 정의되지만, 고도화된 현대 금융시장에서는 그 의미가 한층 확장된다. 단순히 현금을 장롱에 숨긴다는 뜻을 넘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도 그 자본이 기업 설비 투자나 R&D 등 '발행시장(Primary Market)'으로 흐르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신 이미 발행된 주식과 ETF를 거래하는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의 수익률 게임에 매몰되거나, 부동산 빚 돌려막기에만 갇혀버리는 치명적인 '자본 동맥경화' 상태를 뜻한다.


낡은 M2 통계를 왜곡했던 주범이 'ETF 등 수익증권 쏠림'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현재 자본이 얼마나 비생산적으로 겉도는지를 생생히 방증한다. 거시 경제 전반에 깔린 자금 총량(L)은 막대하지만, 신 기준 M2 증가율이 장기 평균을 밑돈다는 것은 시장 내부에서 신용을 창출하고 자본을 돌게 하는 통화 승수와 화폐 유통 속도가 구조적으로 무너졌음을 시사한다.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인 비금융기업이나 부가가치를 창출할 혁신 산업으로 '모험 자본'이 수혈되지 않고, 이미 발행된 자산의 가격표만 펌프질하며 맴도는 꼴이다.


자본이 이토록 경색되어 유동성 함정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흉은 대한민국 경제의 기형적 자산 구조, 즉 과도한 레버리지 위주로 설계된 금융·부동산 시장에 있다. 현재 국내 금융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단연 부동산 PF와 가계 부채다. 지난 수년간 저금리 기조를 타고 빚으로 자산을 불리는 '영끌'이 만연했고, 건설 업계와 금융권은 사업성보다 막연한 '부동산 불패 신화'에 기대 무분별한 PF 대출을 찍어냈다.


그 대가로 가계의 대차대조표는 빚에 짓눌려 소비 여력을 완전히 잃었고, 다수의 중소 건설사와 제2금융권은 미분양 사태와 이자 비용 급증이라는 언제 터질지 모를 부실 뇌관을 안게 됐다. 시중에 돈이 아무리 넘쳐나도 경제 주체들이 빚을 갚거나 부실을 막는 데만 급급해, 정작 새로운 부가가치를 낳는 곳으로는 유동성이 전혀 흘러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빚투(빚내서 투자)'와 '미수거래'의 문턱을 한없이 낮춰버린 기형적인 금융 플랫폼 구조가 이 같은 비생산적 자산 쏠림을 부추기고 있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수천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융자를 끌어오고, 가진 자본의 몇 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미수금)를 일으켜 주식과 ETF 단타 매매판에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실정이다.


이토록 부실한 재무 구조는 결국 중앙은행의 손발을 꽁꽁 묶어 치명적인 딜레마를 초래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최근 불거진 원화 가치 하락을 방어하고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선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좁히는 선제적 기준금리 인상이 절실하다. 정상적인 거시 경제 환경이었다면 중앙은행은 주저 없이 금리를 올려 환율을 방어하고 물가를 통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단 몇 차례 금리 인상만으로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한계 기업과 빚으로 지탱하는 부동산 PF 현장들이 연쇄 부도를 맞을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금리를 올리자니 내수 경제의 시한폭탄인 가계 부채와 건설 부문의 줄도산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번질 판이고, 반대로 금리를 동결하거나 내리자니 원화 약세와 자본 유출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늪에 빠져버렸다.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위기는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서가 아니다. 과거 비생산적인 부동산 자산으로 잘못 흘러 들어간 자본이 부실화되면서, 경제 전반의 자금줄을 마비시키는 유동성 함정과 구조적 부채 탓이다. 이창용 총재가 이전 한국은행의 행보와는 다소 다르게 교육 문제나 지역 불균형 문제 등 사회적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개인들이 주식판과 가상화폐, 부동산에 밀어 넣은 막대한 빚은 고스란히 가계 부채의 폭증으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정작 혁신 기업으로 수혈되어야 할 금융권의 대출 여력마저 이 투기판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냉철히 점검하고 뜯어고치는 구조적 개혁 없이는 어떤 위기도 해결할 수 없다. 다소 복잡하고 착각하기 쉬운 사안인 만큼, 단순하고 선동적인 수치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시급한 해법은 단순히 통화량을 옥죄는 거시적 긴축이 아니다. 곪아 터진 부동산 PF 사업장을 냉정하게 도려내고 한계 기업을 구조조정해 자본의 동맥경화를 먼저 치료해가는 것이다. 나아가 기업 성장을 돕는 본연의 자금 조달 창구여야 할 자본시장이, 빚을 내어 남의 주식을 더 비싸게 사주는 거대한 '레버리지 카지노'로 변질된 작금의 현실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한다.


부실한 재무 구조라는 뼈아픈 현실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 자본 시장의 왜곡을 바로잡아 '생산적 금융'의 회로를 복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경제를 옭아맨 이 거대한 딜레마를 끊어낼 유일한 돌파구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