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PD의 맛있는 이야기
20여 년 전 평양냉면에 심취해 유명 냉면집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초계탕으로 유명한 평양냉면집을 찾았죠. 달게 절인 얼갈이김치를 냉면에 얹어주는 맛집이었죠. 냉면을 기다리는데 테이블 건너 나이 지긋한 할아버님 세 분이 있었습니다. 내공 깊은 단골분들 같더군요.
“임자, 냉면은 좀 있다 주고 소주 한 병 더 가져와 봐. 이것도 한 사라 더 줘보고”
“취하세요. 그만 드세요. 그리고 벌써 세 번째예요”. “맛난 걸 어떻게. 허허”
‘뭘 더 달라는 걸까’라고 생각하는데 반찬이 내 앞에 깔리더군요. ‘아하 이거였구나. 역시 연륜 있는 분들!’.
빨간 닭무침이었습니다. 그 집의 닭무침은 기본 반찬에 추가가 무료였거든요. 어르신들이 선주후면(先酒後麵-술 먼저 냉면은 나중에)을 실천하기에 좋은 동반자였죠. 맛이요? 육수 뺀 닭을 잘게 찢어 참기름, 고춧가루와 겨자, 설탕 넣고 무칩니다. 오이와 무절임도 같이요.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소주 안주로 딱입니다. 물론 마무리는 평양냉면이고요.
닭무침을 정식으로 메뉴에 넣은 집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평양냉면집이죠. 남대문시장의 맹주 부원면옥이 닭무침으로 유명하고, 송추의 평양면옥도 닭무침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맛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공유하는 특징도 있습니다. 겨자죠. 빨간 양념 옷을 입고 있지만, 고춧가루는 거들뿐 매운맛은 겨자가 리드합니다. 식초가 앙상블을 더하고요. 꼭꼭 씹으면 양념맛과 닭고기의 감칠맛이 참 좋습니다. 입술만 빨갛게 강조한 미인의 모습이 떠오르죠.
닭무침에는 특별히 북한 소주를 준비해 봤습니다. 닭무침이 북한 음식이기도 하니까요. 25도의 농태기 소주입니다. 북한 새터민이 남한에서 만든 소주네요. 쌀이 귀한 북한에서 몰래 증류해 먹던 소주 맛이라고 합니다.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나쁘지 않네요. 전통주 미식모임에서 농태기를 함께 시음했습니다. 전반적으로 평들이 좋더군요. 닭무침과 어울림도 좋고요.
“아주 괜찮은데요. 증류식 소주인데도 감칠맛이 있어요”. 농태기에는 한국의 소주처럼 달달한 자극 대신 감칠맛이 있습니다. 이 정체를 미식모임 회원분이 알고 있더군요.
“뒷면 성분표에 효모추출분말이라고 쓰여있잖아요. 그게 조미료예요. 우리가 아는 MSG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돼요. 따지고 보면 미원이나 다시다도 다 효모추출분말이거든요. 하하하”.
역시 맛의 비법은 조미료인 건가요. 전통 증류식 소주에는 첨가물을 넣지 않습니다. 순수 증류주에게 '첨가물 없음'은 자존심이 거든요. 하지만 농태기는 자존심 대신 실용을 선택했습니다. ‘효모추출분말’이라는 조미료를 넣어 감칠맛 도는 증류주를 만들었네요. 최근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동해소주'도 이런 식으로 주조한 소주입니다.
북녘의 고기 요리에는 무침 방식이 많습니다. 닭무침뿐만 아니라 송추의 평양면옥에는 제육무침도 유명하고, 일산 동무밥상에는 소고기 초무침이 있습니다. 대전 사리원면옥의 소고기김치비빔도 명물이지요. 북한에서 고기무침 요리가 발달한 것은 생활환경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바로 추위입니다. 기름으로 볶거나 불로 구운 고기는 추위에 기름이 쉽게 굳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현저히 맛이 떨어지죠. 삶거나 찐 고기를 양념에 무치면 기름기가 충분히 빠져 추위에도 맛과 보관성이 좋아집니다. 요리에 정성과 시간이 더 들어가지만, 맛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겠죠. 북한의 소주 선호도 마찬가지입니다.
1935년 발간된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남한 지역은 주류 소비의 80%가 막걸리였고, 북한 지역은 소주가 90% 였다고 합니다(출처: 중앙일보 2023. 3.6). 1939년 8월 4일 자 동아일보에는 평안남도 지역에 온 남한의 노동자들이 막걸리를 구할 수 없어 도중에 귀향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소주 밖에 없었던 거죠.
북한이 막걸리보다 소주를 압도적으로 소비한 이유도 추위 때문입니다. 도수가 높아 쉽게 얼지 않아 음용성이 좋고, 체온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북유럽이 와인보다 보드카인 이유와 똑같죠. 세상사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닭무침이 막걸리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닙니다. 대신 저도수 막걸리보다는 고도수 막걸리를 선택해 보세요. 달지 않고 산미가 짙은 10도의 봇뜰 탁주나 11도의 마깨주가 좋겠네요.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니 해장은 당연히 평양냉면입니다.
아! 어르신들이 공짜로 닭무침을 드시던 평양냉면집 상호가 뭐냐고요? 평래옥입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무료 추가가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