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탈시설 문제, 가톨릭교회는 어디 서 있는가/정중규

by 정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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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권리를 천부적 인권으로 부여받았다. 동서고금 인권 역사를 보면,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서구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50년 전만 해도 흑인은 미국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20년 전만 해도 동남아 이주민은 한국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다. 10년 전만 해도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아니었다. 결국 인권발달사는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울타리 안으로 하나둘 받아들이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장애인 탈시설운동의 당위성 그 근거는 여기에 있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으로서 내가 장애인 탈시설운동에 앞장 선 이유도 그러했다. 부산에서 장애인운동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자립생활운동(disabled people’s independent living movement)을 알게 되고, 장애인복지의 궁극 목표인 사회통합과 자립생활하려면 당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들부터 지역사회로 불러내는 탈시설 과정이 필요함을 깨우치고서 탈시설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천주교 신자로서 가톨릭장애인복지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대표적인 장애인거주시설인 꽃동네를 비롯해 대형 시설들을 향해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었고, 2016년엔 ‘국민의당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진상조사위원장’으로 대구지역 탈시설운동을 도우기도 했었다. 더 나아가 2018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한국가톨릭장애인사도직협의회 연구위원으로 ‘발달장애인 정책의 현실과 미래, 탈시설을 둘러싼 이슈 논쟁’ 세미나를 개최하며 탈시설운동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소외된 이들을 이스라엘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공동체 복원 작업이었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내 백 마리 양떼가 함께 모여 살게 만들어 소외된 이가 없는 사회공동체를 그분은 하느님나라라고 하셨으니 요즘말로 하면 복지공동체였다.


특히 그분의 치유행위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니,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관 곧 복음적 관점에서 나는 도심지에서 동떨어진 외진 곳에 세워져 장애인들을 격리 수용하는 거주시설들을 비판해왔었다. 지난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비의 특별희년 ‘장애인과 병자들을 위한 주일’ 강론에서 “병자와 장애인들을 안 보이는 곳에 숨기거나 수용소에 가두지 말고 사회에서 함께 살도록 하라”고 권고했듯이, 내게 있어 탈시설운동은 장애인 인권운동이면서 복음정신 실천운동으로 여겨졌기에 원칙적으로 장애인 탈시설 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길로 나아가야한다고 보았다.



‘탈시설 로드맵’으로 오히려 불붙은 장애계의 갈등과 대립


그러다 지난 2020년 12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에 의해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고, 2021년 8월 보건복지부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이하 로드맵)이 발표되자, 장애인 탈시설 문제로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찬반으로 나눠져 대립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생활할 수 있도록 국가책임제 하에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거주시설들은 단계적으로 축소해 10년 이내에 폐쇄하자며 탈시설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소속 부모들이 있는 반면, ‘지금 현실에서 시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며 정부의 ‘로드맵’은 시설에서라도 보호받아야할 중증발달장애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장애인 당사자에게 적합한 생활 형태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소속 부모들도 있다.


장애인단체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일어 한동안 여의도 이룸센터 앞마당에는 찬반 플랜카드를 각기 내건 컨테이너 박스가 대치하는 안타까운 장면도 연출되었다. 정치권도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를 도우는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과 ‘전국장애인부모연대’를 도우는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으로 양분되어 있는 실정이다.


탈시설 움직임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 발달장애인 어머니들이 가톨릭 내의 탈시설운동가로 알려진 나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눈물에 담아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만남을 거듭 가지면서, 중증발달장애인 자녀를 돌봐줄 시설을 찾지 못해 정신병원에 보내야만 하거나 심지어 그마저 해결책을 찾지 못해 자녀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부모들의 아픈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 역시 한없이 가슴이 젖어들었다. 특히 재가 중증발달장애인의 경우 24시간 케어가 필요한데, 1차 돌봄자 부모의 노령화가 심각하다는 것으로, 마침 내게 찾아온 분들이 죄다 연로한 어머니들이셨다. “중증발달장애인과 하루만 살아보라, 24시간 국가가 책임진다 하더라도 나이 많고 도전적 행동이 심한 그들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고 절규하는 이들이야말로 ‘로드맵’의 사각지대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이제껏 너무 내 자신과 같은 지체장애인 위주로만 생각해 발달장애인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설에 거주하는 지체장애인들의 경우 사회로 나와도 시스템적인 지원만 된다면 대부분 자립해 살아갈 수 있지만, 집중적인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발달장애인의 경우 홀로 자립해 산다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을 위한 지역사회 지원 체계가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중증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어려운 현실과 개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하는 ‘로드맵’은 그들의 보호의 책임을 결과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장애인 탈시설 문제 당사자 모여 끝장토론 하는 대토론회 제안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불상생(不殺生)과 비폭력의 아힘사(Ahimsa) 정신으로 길을 걸을 때 벌레들이 발에 밟히지 않도록 지팡이를 두드려 피하게 한다고 한다. 제도와 법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제도와 법의 칼 아래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이들이 없도록 주변을 섬세하게 살피는 배려 정신이 필요하다. 내가 장애인계의 핫이슈로 등장한 탈시설 문제를 관련 당사자 모두가 모여 끝장토론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제안하는 이유다.


이제껏 다른 장애인 관련 문제들과는 달리 장애인 탈시설 문제는 특이하게 사회적 이슈가 되기 전에 장애계 안에서부터 찬성 진영과 반대 진영으로 나눠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그 갈등 현장을 바라보면서 ‘탈시설이 먼저냐, 지원체계 마련이 먼저냐’ 곧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흑백논리 이분법적 접근보다는 문제해결중심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론화 과정과 진솔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낀다.



애지람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이 나아갈 한 길을 그려보다


그런 점에서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발달장애인통합지원센터 애지람은 장애인 탈시설의 나아갈 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지람은 우선 도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40명 정원 중 24명 입주 장애인이 이른바 탈시설(시설의 탈시설) 장애정도와 기능에 맞춰 강릉 시내에 1인 독립홈 5개와 2인~4인 자립홈 6개의 거주 지원과 일자리 창출과 직무훈련을 위한 지역거점의 센터 역할을 하는 카페 ‘프코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가 되는 애지람 본원은 대부분 1인 1실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에 최중증 노령에다 도전적 행동이 심한 발달장애인을 위해선 의료복합 서비스를 하는 등 개별 맞춤형 지원을 펼치고 있다.


특히 탈시설 찬반 논란의 핵심이 되는 시설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 삶의 질 향상과 행복 그리고 발달장애인 가족들이 걱정하는 시설 내의 안전과 케어의 요소까지 포함하여 장애인 개성에 맞는 거주 지원과 일자리 창출, 성(性)인권 지원까지 24시간 지원체계를 갖춘 곳으로, 탈시설과 지역사회돌봄 서비스를 통합한 대안 기관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시설의 탈시설’을 꾀하는 애지람은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온전히 실현될 때까지 과도기적 중간집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복지공동체를 만드셨던 예수 그리스도


더 나아가 가톨릭교회의 특성이자 장점이 행정구역에 맞게 거의 동마다 본당이 있는 것인데, 각 본당마다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발달장애인 사회통합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대구교구 토마스본당의 경우 그런 공간을 제공하자 부모회와 같은 자발적인 모임이 만들어지고, 교리반도 운영되고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이 전례공동체의 일원으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가 발달장애인들을 사회복지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신자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 발달장애인 사회통합에 촉진제가 될 것이다.


그런 움직임은 교회가 이제껏의 시설 중심 장애인복지에서 사회통합 지향 장애인운동에 교회의 복지자원을 투신하도록 하는데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다. 장애인들이 “각종 사회문제 투쟁현장에는 신부님들이 보이는데, 유독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외치는 인권투쟁 현장에서는 신부님들을 만날 수 없다”고 비판하는데, 뼈아픈 지적 아닌가. 사실 특수사목 사제들은 죄다 시설장으로만 만난다. 이 시대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그분은 시설장보다는 장애인들이 사회통합을 외치는 현장에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교 장애인복지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


지난 세월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에 가톨릭교회가 공헌한 바는 지대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장애인복지 패러다임이 사회통합과 자립생활을 지향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의 장애인복지는 시설 중심이고 장애인복지 예산의 많은 부분도 거기에 집중되고 있다. 거기 부인할 수 없게도 가톨릭교회가 주도적 역할하고 있어, 장애인복지 발전에 디딤돌이었던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 듣고 있다. 이제껏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쌓아온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과 경험을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투신해야하는 이유다.



카리타스 수호자로 우뚝 선 로메로 대주교, 정의와 복지가 만나다


마침 지난 2015년 5월 17일, 세계 각국 천주교주교회의 산하 사회복지 담당기구인 카리타스들의 연합체인 국제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 제20차 총회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이제까지의 수호자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와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공동 수호자로 추대되었다. 교회의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가 마더 데레사로 상징되는 시혜적 복지에서 한 걸음 진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사업’에 익숙한 이들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다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가 사회복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의아해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꽃동네에서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라”고 강론했는데, 바로 로메로 성인이야말로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는 삶을 살다 순교 당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로메로 성인을 통해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카리타스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의미가 깊다. 교회의 장애인복지는 시설 사업‘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막는 구조를 혁파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심장에 자리 잡은 로메로, 다시 찾은 예수의 복지 마인드


그렇게 ‘성인이 되는 길’에 장애인을 비롯해 취약계층과의 연대를 통해 인간발전을 이루려는 복음적 투쟁과 투신이 로메로 성인을 통해 합류했다. 어쩌면 로메로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기치로 삼았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반세기만에 맺은 첫 열매인지도 모른다. 인간발전을 꾀한 로메로 성인의 거룩한 삶을 카리타스가 받아들인 것은, 교회의 심장인 카리타스 한 가운데에 로메로 성인의 삶이 자리 잡은 것이 된다.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회복지가 잃어버렸던 예수의 마음, ‘구조 혁파를 통해 소외된 이들을 사회로 통합시켰던’ 그 복지 마인드를 다시 되찾았다는 소중한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의 정의평화평의회, 사회복지평의회, 이주사목평의회, 보건사목평의회를 합쳐 ‘인간발전성’을 만든 것에서도 확인된다. 장애인 탈시설 문제에서도 교회는 인간발전을 추구하는 이러한 복지 마인드 그 복음적 원칙을 고수하고 수호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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