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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추모 미사 / 정중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회 장애인사도직협의회

by 정중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회 장애인사도직협의회

세상을 떠난 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추모 미사와 정기 세미나

1부 / 세상을 떠난 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추모 미사 : 유경춘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 집전

2부 / 정기세미나 : 현 정부의 장애인복지 서비스 흐름과 방향

발제 (1) 장애인 탈시설 문제, 가톨릭교회는 어디 서 있는가 / 정중규 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 연구위원

발제 (2) 장애인 권리협약에 따른 자립생활 지원, 우리가 가야 할 길 / 지은화 충북재활원 마리아의집 사회복지사

2022.10.13. 오후2시.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6층 성당

주최 : 한국가톨릭장애인사도직협의회

장애인 탈시설 문제, 가톨릭교회는 어디 서 있는가 / 정중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장애인사도직협의회 연구위원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권리를 천부적 인권으로 부여받았습니다. 동서고금 인권 역사를 보면,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서구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흑인은 미국 사회에서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인권발달사는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울타리 안으로 하나둘 받아들이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애인 탈시설운동의 당위성 그 근거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으로서 제가 장애인 탈시설운동에 앞장 선 이유도 그러했습니다. 부산에서 장애인운동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자립생활운동(disabled people’s independent living movement)을 알게 되고, 장애인복지의 궁극 목표인 사회통합과 자립생활하려면 당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들부터 지역사회로 불러내는 탈시설 과정이 필요함을 깨우치고서 탈시설운동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가톨릭장애인복지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대표적인 장애인거주시설인 꽃동네를 비롯해 대형 시설들을 향해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었고, 2016년엔 ‘국민의당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진상조사위원장’으로 대구지역 탈시설운동을 도우기도 했었습니다. 더 나아가 2018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한국가톨릭장애인사도직협의회 연구위원으로 ‘발달장애인 정책의 현실과 미래, 탈시설을 둘러싼 이슈 논쟁’ 세미나를 개최하며 탈시설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 치유행위에서 나타나는 사회통합 정신


무엇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소외된 이들을 이스라엘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공동체 복원 작업이셨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내 백 마리 양떼가 함께 모여 살게 만들어 소외된 이가 없는 사회공동체를 그분은 하느님나라라고 하셨으니 요즘말로 하면 복지공동체였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공동체의 똑같은 구성원으로 수용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장애를 죄와 동일시하거나 장애인을 단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치유행위는 그 시대에 비추어 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장애인을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복귀·통합시키는 과정이었으며, 장애인당사자가 스스로 인간존엄성을 되찾아 일어설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특히 그분의 치유행위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치유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패턴입니다. 곧 ① 먼저 당사자에게 “네가 낫기를 바라느냐?”고 반드시 확인하고 난 후 치유행위를 행하셨고, ② 치유행위가 일어난 후엔 그 결과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면서 그분의 권능이 아닌 당사자의 믿음이 치유를 낳은 것임을 주지시키셨고, ③ 그 후엔 “사제에게 치유되었음을 확인받도록 하라.”고 지시하시는데 요즘으로 보면 주민증 발급을 통한 공민권 회복과 같은 사회적 재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관 곧 복음적 관점에서 저는 도심지에서 동떨어진 외진 곳에 세워져 장애인들을 격리 수용하는 거주시설들을 비판해왔던 것입니다. 지난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특별희년 ‘장애인과 병자들을 위한 주일’ 강론에서 “병자와 장애인들을 안 보이는 곳에 숨기거나 수용소에 가두지 말고 사회에서 함께 살도록 하라”고 권고했듯이, 제게 있어 탈시설운동은 장애인 인권운동이면서 복음정신 실천운동으로 여겨졌기에 원칙적으로 장애인 탈시설 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길로 나아가야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탈시설 로드맵’으로 오히려 불붙은 장애계의 갈등과 대립


그러다 지난 2020년 12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에 의해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고, 2021년 8월 보건복지부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이하 로드맵)이 발표되자, 장애인 탈시설 문제로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찬반으로 나눠져 대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생활할 수 있도록 국가책임제 하에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동시에 대규모 거주시설들은 단계적으로 축소해 10년 이내에 폐쇄하자며 탈시설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소속 부모님들이 있는 반면, ‘지금 현실에서 시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며 정부의 ‘로드맵’은 시설에서라도 보호받아야할 중증발달장애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장애인 당사자에게 적합한 생활 형태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소속 부모님들도 계십니다.

장애인단체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일어 한동안 여의도 이룸센터 앞마당에는 찬반 플랜카드를 각기 내건 컨테이너 박스가 대치하는 안타까운 장면도 연출되었습니다. 정치권도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를 도우는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과 ‘전국장애인부모연대’를 도우는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으로 양분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탈시설 움직임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 발달장애인 어머니들이 가톨릭 내의 탈시설운동가로 알려진 저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습니다. 눈물에 담아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만남을 거듭 가지면서, 중증발달장애인 자녀를 돌봐줄 시설을 찾지 못해 정신병원에 보내야만 하거나 심지어 그마저 해결책을 찾지 못해 자녀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부모님들의 아픈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저 역시 한없이 가슴이 젖어들었습니다. 특히 재가 중증발달장애인의 경우 24시간 케어가 필요한데, 1차 돌봄자 부모의 노령화가 심각하다는 것으로, 마침 제게 찾아온 분들이 죄다 연로한 어머니들이셨습니다. “중증발달장애인과 하루만 살아보라, 24시간 국가가 책임진다 하더라도 나이 많고 도전적 행동이 심한 그들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고 절규하는 그분들이야말로 ‘로드맵’의 사각지대에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님들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고, 심정적으로 맞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이제껏 너무 제 자신과 같은 지체장애인 위주로만 생각해 발달장애인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설에 거주하는 지체장애인들의 경우 사회로 나와도 시스템적인 지원만 된다면 어느 정도 자립해 살아갈 수 있지만, 집중적인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발달장애인의 경우 홀로 자립해 산다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지역사회 지원 체계가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중증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어려운 현실과 개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하는 ‘로드맵’은 그들의 보호의 책임을 결과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당연히 들었습니다.


장애인 탈시설 문제 당사자 모여 끝장토론 하는 대토론회 제안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불상생(不殺生)과 비폭력의 아힘사(Ahimsa) 정신으로 길을 걸을 때 벌레들이 발에 밟히지 않도록 지팡이를 두드려 피하게 한다고 합니다. 제도와 법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제도와 법의 칼 아래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이들이 없도록 주변을 섬세하게 살피는 배려 정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장애인계의 핫이슈로 등장한 탈시설 문제를 관련 당사자 모두가 참여하는 공론의 장, 더 나아가 끝장토론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제안하는 이유입니다.

이제껏 다른 장애인 관련 문제들과는 달리 장애인 탈시설 문제는 특이하게 사회적 이슈가 되기 전에 장애계 안에서부터 찬성 진영과 반대 진영으로 나눠 마치 제로섬 게임하듯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그 갈등 현장을 바라보면서 ‘탈시설이 먼저냐, 지원체계 마련이 먼저냐’ 곧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흑백논리 이분법적 접근보다는 문제해결중심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론화 과정과 진솔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애지람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이 나아갈 한 길을 그려보다


그런 점에서 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발달장애인통합지원센터 애지람은 장애인 탈시설 문제의 대안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애지람은 우선 강릉시라는 도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40명 정원 중 24명 입주 장애인이 이른바 탈시설(시설의 탈시설) 장애정도와 기능에 맞춰 강릉 시내에 1인 독립홈 5개와 2인~4인 자립홈 6개의 거주 지원과 일자리 창출과 직무훈련을 위한 지역거점의 센터 역할을 하는 카페 ‘프코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부가 되는 애지람 본원은 대부분 1인 1실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에 최중증 노령에다 도전적 행동이 심한 발달장애인을 위해선 의료복합 서비스를 하는 등 개별 맞춤형 지원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탈시설 찬반 논란의 핵심이 되는 시설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 삶의 질 향상과 행복 그리고 발달장애인 가족들이 걱정하는 시설 내의 안전과 케어의 요소까지 포함하여 장애인 개성에 맞는 거주 지원과 일자리 창출, 성(性)인권 지원까지 24시간 지원체계를 갖춘 곳으로, 탈시설과 지역사회돌봄 서비스를 통합한 대안 기관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설의 탈시설’을 꾀하는 애지람은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온전히 실현될 때까지 과도기적 중간집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발달장애인을 복지 대상이 아닌 신자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그밖에 여러 대안들은 지은화 발제자님께서 발표문에서 잘 제시해주셨고, 이제 저는 보다 근본적인 메시지를 교회를 향해 드리고 싶습니다. 곧 가톨릭교회의 특성이자 장점이 행정구역에 맞게 거의 동마다 본당이 있는 것인데, 각 본당마다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발달장애인 사회통합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구교구 토마스본당의 경우 그런 공간을 제공하자 부모회와 같은 자발적인 모임이 만들어지고, 교리반도 운영되고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이 전례공동체의 일원으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교회 안에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단기보호센터, 주간보호센터, 평생교육센터 등 다양한 이용시설에도 교회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아무래도 조기노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 그에 걸맞는 요양센터에 대한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발달장애인들을 장애인복지 대상자로만 여기지 말고 신자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 발달장애인 사회통합에 촉진제가 될 것이다.

그런 움직임은 교회가 이제껏 투신해왔던 시설 중심 장애인복지에서 사회통합 지향 장애인운동에 교회의 복지자원을 투신하도록 하는데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각종 사회문제 투쟁현장에는 신부님들이 보이는데, 유독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외치는 인권투쟁 현장에서는 신부님들을 만날 수 없다”고 비판하는데, 뼈아픈 지적입니다. 사실 특수사목 신부님들은 죄다 장애인거주시설장으로만 만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시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그분은 시설장으로 계시기보다는 장애인들이 사회통합을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을 찾아오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장애인복지운동가로 활동했던 30여년에 걸친 제 경험상으로 그리스도교 장애인복지의 미래는 여기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장애인복지운동가로 지낸 제 얘기를 잠시 하고자 합니다. 상이용사들을 제외한 다른 장애인운동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저 역시 장애인운동에 뛰어든 것은 88장애인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장애인거주시설과 재가장애인 선교회 두 가지 일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민주화운동과 성령쇄신운동을 하면서 뵙게 된 오수영 신부님께서 1986년에 세운 오순절 평화의마을에 홍보와 편집을 맡으면서 신부님을 도우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 같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터지고, 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지자체에서 형제복지원 부랑인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해오면서 평화의마을 거주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오순절평화의마을이 초기부터 지녀왔던 애덕의 가족 분위기마저 훼손당하며 ‘숫자가 주는 한계’ 그 늪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평화의마을 10주년사 책자까지 직접 제작했던 제가 ‘이것은 아니다’ 하며 장애인 탈시설을 생각하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부터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와 함께 제가 거의 동시에 88장애인올림픽 이후 부산에서 몇몇 장애인 신자들과 함께 부산가톨릭지체장애인선교회를 창립했는데, 당시 우리 지체장애인들의 현실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선교회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집안에 숨어있는 장애인들을 찾아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을 찾아내 부산주교좌 남천성당 선교회 월미사에 참여시키고, 레지오반을 만드는 등 사회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임이 자리 잡으면서 교구에서 선교회를 복지회로 승격시키는 등 지금은 부산교구에서 장애인복지 메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장애인거주시설과 재가장애인선교회 일을 동시에 관여하면서 제 나름 장애인복지가 나아갈 길을 그려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로드맵 사태와 관련해서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들이 탈시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만 알려진 것은 장애인복지 전문가이자 가톨릭 신자인 제게는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카리타스 수호자로 우뚝 선 로메로 대주교, 정의와 복지가 만나다


마침 지난 2015년 5월 17일, 세계 각국 천주교주교회의 산하 사회복지 담당기구인 카리타스들의 연합체인 국제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 제20차 총회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이제까지의 수호자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와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공동 수호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교회의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가 마더 데레사로 상징되는 시혜적 복지에서 한 걸음 진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기존의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사업’에 익숙한 이들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다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가 사회복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의아해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꽃동네에서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라”고 강론하셨는데, 바로 로메로 성인이야말로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는 삶을 살다 순교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메로 성인을 통해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카리타스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의미가 깊다고 봅니다. 교회의 장애인복지 역시 시설 사업‘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막는 구조를 혁파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심장에 자리 잡은 로메로, 다시 찾은 예수의 복지 마인드


그렇게 ‘성인이 되는 길’에 장애인을 비롯해 취약계층과의 연대를 통해 인간발전을 이루려는 복음적 투쟁과 투신이 로메로 성인을 통해 합류했습니다. 인간발전을 꾀한 로메로 성인의 거룩한 삶을 카리타스가 받아들인 것은, 교회의 심장인 카리타스 한 가운데에 로메로 성인의 삶이 자리 잡은 것이 됩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청의 정의평화평의회, 사회복지평의회, 이주사목평의회, 보건사목평의회를 합쳐 ‘인간발전성’을 만든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장애인 탈시설 문제에서도 교회는 인간발전을 추구하는 이러한 복지 마인드 그 복음적 원칙을 고수하고 수호해야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원리인 공동선 연대성 보충성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제가 가톨릭 신자로 살며 늘 가슴에 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곧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말씀입니다. 안주하지 않는 삶, 가톨릭 선교는 그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힘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 새로운 미션에 늘 예민하게 눈길이 향하고 가슴이 열려있어야 하고 거기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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