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SDF 제1회 기조연사였던 ‘디지털이다’의 저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MIT 미디어랩 초대 소장은 당시 20년 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을 먹고 입을 것이며, 모든 곳에 디지털 기술이 적용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2024년 현재, 우리는 아직 디지털 기술을 먹고 입지까지는 않지만 우리 삶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디지털 기술이 확산된 것은 사실입니다.
네그로폰테 교수에 따르면 정보량의 최소 단위인 1과 0의 ‘비트’라는 콘셉트가 등장하고 나서야 물질과 아이디어를 넘어서는 디지털을 통한 컨버전스 즉 융복합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 영향으로 ‘지적재산권’ 같은 이전에는 없던 개념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기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는 기술이 바로 ‘파괴적 혁신 기술(disruptive technology)’입니다. 2004년 SDF에서는 통신과 방송의 결합으로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인 온라인 스트리밍 기술을 통해 방송을 접하게 된 상황이었는데요. 또 SDF2007 당시 앞으로는 방송사가 편성한 때에 맞춰서가 아니라 원하는 시간에 소비자가 프로그램을 원하는 방식으로 몰아보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그럴까 신기하게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럼에도 지난 20년 돌아보면 시대를 주도하는 파괴적 혁신 기술은 한 가지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또 ‘소셜미디어’에서 ‘AI’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무조건 사람들이 그 기술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 지상주의에 빠졌었던 것인데요. 그런데 2010년 SDF에서 3D기술에 대해 다룬 이후 3D기술과 관련해 얘기했던 장밋빛 전망들이 전혀 그렇게 발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여러가지 이유로 시장이 선택하지 않으면 혁신기술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중화에 성공하는 기술만이 최종 파괴적 혁신기술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인데요.
▲ SDF2010 기조연사 영화 ‘아바타’ 감독 제임스 카메론, 당시 SDF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과 가장 비슷한 3D영상기술이 모든 실사 촬영에 접목될것으로 예측했으나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3D애니메이션 영화에서만 명맥을 이어감
대표적 파괴적 혁신 기술을 개발한 인물을 꼽아보자면 무선통신 산업의 선구자이자 1973년 모토로라에서 일하면서 휴대전화를 개발해 1983년 시장화에 성공한 마틴 쿠퍼, 1977년 애플II 컴퓨터의 개발로 개인용 컴퓨터의 붐을 일으키고 이후 2007년 최초의 스마트폰인 아이폰, 아이패드를 출시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이동이 가능한 컴퓨터 시대를 열어간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 IBM PC 호환용 운영체제인 도스와 윈도 등 개인용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장악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설립자 빌 게이츠, 1989년 웹사이트들을 연결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을 개발한 팀 버너스-리, 검색엔진을 개발해 월드와이드웹 상의 정보를 찾는데 새로운 지평을 연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전 세계의 30억 인구가 사용한다는 소셜미디어인 구 페이스북, 현 메타의 공동설립자 마크 저크버그, 챗GPT를 내놓으면서 전 세계를 AI열풍으로 몰아넣은 오픈AI의 공동창업자 샘 올트만 등이 있을 텐데요. 모두 대중화에 성공한 파괴적 혁신 기술 사례들입니다.
▲ SDF2004 대표연사 ‘휴대전화의 아버지’ 마틴 쿠퍼, SDF2013의 기조연사 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리, SDF2008의 기조연사 MS회장 빌 게이츠
기술자체보다는 그 기술이 얼마나 사회에서 필요한 지가 혁신기술로 도약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좌우한다는 것도 SDF 20년을 지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결국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이어야 한다는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인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그러한 문제의식은 비슷한 사람들끼리보다는 자신과 다른 분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접하게 될 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변에 다양성을 높이는 게 중요한데요. 2010년대를 전후해서 특히 어떻게 하면 새로운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특히 미국 MIT대학을 중심으로 ‘융합’을 둘러싼 많은 실험들이 이뤄졌는데요. 예를 들어 MIT 미디어랩에서는 평소에 서로 접할 일이 많지 않은 IT개발자들과 사회 이슈에 정통한 언론인들, 그리고 디자이너 등으로 팀을 이뤄 스타트업에서처럼 집단지성을 모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해 내기 위한 많은 시도들을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살아생전 어떤 혁신도 한 사람이 혼자서 해내는 경우는 드물며 다양한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는 집단지성 속에서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기술 혁신도 결국은 사회문제와 연계될 때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결론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놓기만 한다고 해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각각의 분야에서 엄청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될 때 파괴적 혁신의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하는데요. 그 발견은 개발자에게서 올 수도 있고 기획자에게서 올 수도 있지만 결국은 여러 I자형 인재로부터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종합해 내고 새롭게 연결해내는 M자형 인재에게서 결국 나타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SDF다이어리 EP149. 반드시 알아야 할 AI시대 자녀학습법 대공개에서 인용
월드와이드웹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또 소셜미디어로 전 세계의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모르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까지 알게 되면 더 나은 판단을 하고 더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미래를 그렸었는데요.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연결된 개인들은 ‘미투 운동’[3]같은 용기 있는 움직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혐오를 부추기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비슷한 생각이나 가치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면서 더 분절되고 양극화된 세상의 모습을 보이고도 있습니다.
[3] 미투 운동 :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소셜미디어 상의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여론을 결집하여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것. 미국에서 2017년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하기 위한 방식으로 시작된 것이 그 시초이다.
▲ SDF2018 ‘용기를 낸 사람들’ 세션의 할리우드 배우 로즈 맥고완, SDF2022 ‘외로움은 어떻게 포퓰리스트의 표적이 되었나’ 세션, 노리나 허츠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교수
그래서 어떻게 해야 기술이 더 많은 사람들을 연대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어떻게 하면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지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지난 20년, SDF가 포럼이라는 형식의 공론장을 통해 하고 싶었던 역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러한 기술의 여러 이슈에 대해 같이 논의하고 머리를 맞댐으로써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2004년 SDF의 첫해 축하 메시지는 드림웍스의 설립자 제프리 카젠버그, 컴퓨터 제조회사 델의 회장 마이클 델, 야후 설립자 제리 양 등이 보내줬었는데요. 지난 20년간 ICT 산업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그 인물들만 봐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당시에는 엄청난 세간의 관심을 받았으나 명맥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노키아, 세컨드라이프, 플리커, 버즈피드, 바이스 등 지난 20년간 끊임없는 부침을 맞은 기업과 서비스들도 많았는데요. 획기적인 서비스 자체 못지않게 변화하고 버텨내는 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기회가 된다면 살아남는 기업과 서비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살펴보고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