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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Apr 03. 2024

이별이 어려운 어른들에게, 로봇드림

영화 <로봇 드림> 리뷰, 결말 스포일러 있음


 초등학교 4학년, 단짝 친구들이 생겼을 때를 떠올려본다. 교문을 기준으로 나는 친구들과 집 방향이 정반대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집이 있었지만 나의 하교는 유난히 길었는데,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친구들 집 방향으로 따라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헤어지는 게 참 아쉬웠다. 그래서 어떤 날은 내가 친구들을 데려다주고 나면 친구들이 나를 다시 데려다주고, 내가 또 아쉬워서 친구들을 데려다주고... 하룻밤만 자면 교실에서 만날 사이지만 핸드폰도 없고 메신저도 즐겨 쓰지 않던 시절엔 학교가 끝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이별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저 동심일 뿐이었으면 좋겠건만 이별을 어려워하는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절교해서 안부도 모르는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 오래전 선물 포장지들 조차 버리기 아쉬워 모아놓은 박스가 서너 개에, 스마트폰 생긴 이후로 찍은 사진들이 담긴 클라우드는 꽉 찬 지 오래다. 과거를 곱씹으며 추억과 이별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날들만 늘어갈 뿐이다.


  <로봇 드림>을 보고 울었다는 어른들이 많다. 나 역시 눈물 콧물이 계속 쏟아져 나와 극장 화장실에서 마저 울기까지 했다. 이 영화는 이별을 이야기한다. 꽉 닫힌 엔딩을 보여준다. 그들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잔인하게 보여줬다. 이별이 어려운 나를 제대로 저격한 영화였다.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라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작품 <로봇 드림>은 덜컥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이슈가 되었다. 1980년대 뉴욕 배경의 투박하고 간결한 그림체를 가진 이 작품은 요즘 시대 답지 않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약간의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다. 103분의 러닝타임이 적막하고 어색할 것 같지만 감각적이고 재지한 음악들이 있어 지루함이 없다. 오히려 목소리가 없기에 캐릭터의 표정과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뉴욕에서 혼자 살아가는 도그는 외롭다. 가족도 친구와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도그는 어느 날 텔레비전의 로봇 광고를 보고 로봇을 주문하게 된다. 도그는 로봇을 조립한다. 로봇은 그렇게 탄생했다. 고철로봇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창문 밖에서 도그의 방을 구경하던 비둘기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갔을 때 그의 외로움도 사라졌다.



  이 영화의 주제곡인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은 로봇과 도그가 센트럴 파크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처음 등장한다. 아직 여름의 푸름이 가시지 않는 뉴욕의 9월, 모든 것이 새롭고 서툰 로봇에게 도그는 뉴욕의 지하철을, 센트럴 파크의 핫도그를, 허드슨강의 노을을 보여준다. 둘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쿵작이 잘 맞았다.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사랑이 차올랐다.



  그들이 코니 아일랜드 해변으로 물놀이를 갔을 때, 무엇이 문제였는지 퇴장시간이 되도록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하던 로봇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에 들어갔기 때문일까? 다이빙을 해서? 잠수를 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로봇은 도그와 함께 갈 수가 없다. 도그는 내일 오겠다며 눈빛을 보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날이 해수욕장 개장 마지막 날이었음을 도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알게 되었다. 보안 직원에게 애걸복걸해도 소용없다. 로봇은 그저 눈을 꿈뻑이며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다음 개장은 6월 1일. 그렇게 도그와 로봇의 길고 외로운 겨울이 시작되었다.



  도그가 시청에 찾아가 입장 허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로봇은 도그를 기다린다. 로봇은 그렇게 꿈을 꾸기 시작한다. 어느 날 몸이 움직여 콧노래를 부르며 도그의 집까지 걸어간다. 하지만 초인종을 눌러도 도그는 나오지 않는다. 로봇은 자신을 똑 닮은 새로운 로봇과 함께 걸어가는 도그를 본다. 로봇은 자기도 모르게 쓰레기통 뒤편으로 몸을 숨긴다. 새로운 로봇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비웃고 가버렸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


  로봇이 도그에 대한 꿈을 꾸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해상훈련을 하던 토끼들의 보트에 구멍이 나면서 그들은 잠시 해수욕장에 정착을 하다가 로봇을 발견한다. 로봇을 구출해주려나 싶었는데 로봇의 다리를 멋대로 잘라 구멍 난 부분을 메꾸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한쪽 다리가 잘린 로봇은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동안 꽁꽁 얼려있다가 봄이 되면서 작은 어미새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어미새는 로봇의 겨드랑이에 둥지를 만들었다. 로봇은 아기새들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날갯짓 배운 새 가족이 떠나는 순간까지 아기새들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또 도와준다.


  도그의 로봇 구출 계획이 모두 좌절이 되면서 그는 6월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여러 번 도전을 했다. 하지만 모든 인연들이 찰나처럼 지나갈 뿐 도그는 다시 혼자가 된다. 언제나 로봇을 향한 짙은 향수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6월이 되면 만나겠지.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어서 6월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6월이 되기 전, 몰래 들어온 고물장수가 로봇을 멋대로 수거해 가 버리고, 6월이 되자마자 해변에 달려온 도그는 많은 동물들이 보건 말건 땅을 깊게 파지만 로봇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 속에 빠진 도그는 진실로 혼자가 된 것이다.



 

  고물장수에게 팔린 로봇은 고물장 사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로봇을 다시 만날 것이란 기대를 저버린 도그는 결국 새로운 로봇을 구매하게 된다.

  영화가 이렇게 끝났으면 정말 속상했을 텐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후 호텔 전업 수리공인 파스칼이 로봇의 부품을 우연찮게 구하게 되면서 로봇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 파스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디오 본체를 이용해 로봇의 몸통을 새롭게 탄생시켜 주었다. 로봇은 이후로 파스칼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서 파스칼의 호텔 수리 일을 돕게 된다.


  호텔 옥탑방에서 둘만의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한 어느 날, 로봇은 냉장고에서 재료를 찾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도그와 도그의 새 친구 로봇이 걸어가고 있었다. 로봇이 수없이 꿈속에서 그리고, 또다시 만났던 도그의 모습. 로봇은 들고 있던 핫소스를 떨어트리고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간다. 도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숨 가쁘게 뛰어간다. 둘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로봇의 눈에는 도그의 곁에 있던 새 로봇의 얼어붙은 표정이 들어오고, 뒤에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따라온 파스칼이 서있다.



  이 모든 게 찰나의 꿈이었다. 로봇은 잠시 고민하다가 움직이지 않기로 선택한다. 꿈속에서 보았던 자신을 똑 닮은 로봇이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얼어붙었던 마음을 배웠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하는 파스칼의 사랑이 너무나 충분하기 때문에. 새 친구 로봇과 함께 걸어가는 도그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몸통인 라디오에 탑재된 테이프를 재생시킨다. <Robot's favorite>이라고 적힌 테이프에서 재생된 곡은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이다. 볼륨을 키워 로봇은 도그에게 그들이 함께 즐겼던 음악을 들려준다. 도그는 본능적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로봇과 함께 추던 춤을 춘다. 로봇은 도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고 파스칼의 옥탑방에서 도그와 함께 추었던 춤을 춘다.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가 함께 했던 9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았던 동작을 재현한다.


  어렴풋이 호텔 고층에서 로봇의 모습이 보여 도그가 표정을 굳히고 로봇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로봇은 벽 뒤로 숨는다. 로봇은 도그를 만나지 않기로 한다. 로봇은 파스칼과 바비큐 파티를 하던 도중이었다. 도그는 새 친구 로봇과 함께 놀러 가던 중이었다. 서로 곁에 있는 소중한 인연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로봇은 도그와의 재회를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도그는 새로운 친구 로봇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들만의 음악과 그들만의 춤을 추면서 나아간다.



  영화를 보며 눈물이 자꾸만 났던 건 로봇 때문이다. 이 로봇은 어찌나 성숙했는지 만남과 기다림, 헤어짐까지 모두 사랑한다. 관계는 만남과 기다림, 헤어짐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포함한 '관계' 속에서 행복해할 줄 안다. 처음엔 꿈속에서 무작정 도그를 만나러 가기만 했던 로봇이 이제는 도그를 회상하는 그리움 속에서도 행복해하고(꽃들과 탭댄스를 추는 꿈), 더 이상 도그와의 만남을 이어가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그저 도그와 함께 했던 추억을 언제든지 꺼내 틀어볼 수 있도록 가슴에 담고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관계와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도그 또한 로봇이 바다에 들어간 후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을 알기에 새 친구 로봇과 함께 바다에 갔을 땐 그가 바닷물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는 그들을 성장시켰고, 성숙시켰다.


  관계를 경험하지 않으면 자라날 수 없고, 이별하지 않으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른이지만 아픔을 딛고 선 미래가 과거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지, 어른들은 내심 겁이 난다. 변화는 그저 두려운 것이고 내가 겪은 과거만큼 찬란하지 않을 것이라는 움츠려든 마음이 오히려 더 안락하게 느껴진다.


  그런 관객들에게 과거를 마주하고도 무너지지 않고 그저 즐기고 사랑하는 로봇의 모습은 마음 깊은 곳 무언가를 자꾸만 건든다. 사실 모두에게는 많은 것들과 이별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그와 함께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무심결에 나는 그 욕구를 스크린을 통해 마주해버리고 말았다.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는 영화란 깨어있을 때 우리가 꿀 수 있는 꿈과 같다고 말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꿈을 내면 정화의 도구로 설명하기도 했다. 로봇이 수없이 꿈을 꾸는 로봇 드림이라는 꿈 속에서, 설레어하고 아파하고 감동받으면서 나는 나를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픔에서 의연해진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나를 지나쳐갈 수많은 인연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이 행복했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을 담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나간 것들을 유쾌하게 떠올리는 이 영화의 주제곡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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