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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Jan 04. 2017

저널리즘의 윤리

저널리즘이 너절해져 버린 지 오래인 시대에 살면서 저널리즘의 윤리를 얘기하기는 힘들다. 글을 시작하는 문장으로는 상당히 부적절하지만 이 땅의 썩개를 지키는 한 사람으로서 썩개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기도 하다. 


JTBC의 기자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 씨를 추적 취재하다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정유라 씨가 체포되는 과정을 취재하여 특종으로 단독 보도를 했다. 많은 국민들은 속 시원하게 생각했고, JTBC의 보도에 칭찬을 보냈으나, 박상현 메디아티 이사는 뭔가 좀 다르게 생각을 했다. 


이 상황에 대해 박상현 이사는 JTBC의 기자가 보도윤리를 위반했다고 생각했으며 그 과정을 글로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리고, 미디어오늘과 허핑턴포스트에 기사로 게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많은 댓글 등이 달리면서 반론과 동의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나 또한 메이저는 아니지만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정리해 본다.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간단한 주제들


1) 질투


먼저, 박성현 이사의 주장 자체를 일종의 질투라고 보는 시각이 몇 건 눈에 띄었다. 미안하지만 매우 유치하고 저열한 시각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긴 하겠지만 그런 상황을 빗대어 발화자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모욕이다. 


어떤 이의 주장을 접하게 되면 최대한 선의에 입각해 그 주장을 해석해 줘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룰이며 논쟁의 기본이다. 실제로 JTBC의 인기가 떨어지면 박성현 이사가 어떤 이익을 보게 되더라도 그 메커니즘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런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선의에 입각한 해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룰을 배제해 버리면 바로 이 지적, 즉 “질투에 의한 초치기”라는 주장 역시 박성현 이사와 뭔가 악연이 있는 자의 주장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 잊지 말자. 


2) 왜 가르치려고 하는가?


진보는 왜 항상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가, 그러기 때문에 진보는 인기가 없다, 뭐 이런 식의 의견을 발견했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경우에 약간은 낯선 이론에 기반한 주장을 전개하게 되면 언제나 나오는 의견이기도 하다. 정치적 올바름(PC)에 관해서도 많이 나오며 다양한 진보적 주장에 대해 가르치려고 좀 하지 말라는 반응은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 반응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략 어떤 것일 거라는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지식의 많고 적음은 결코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누군가는 직업적으로 지식을 흡수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선천적인 호기심의 과잉으로 지식을 많이 수집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도 언제든지 지식을 흡수할 수 있으며 내가 어떤 특정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다분히 우연한 일이지 내가 뭔가 부족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내가 몰랐던 지식인데 내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지금 배우면 될 일이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무시하면 될 일이다. 


누가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한다면 재미있으면 배울 일이고, 흥미 없으면 무시하면 되는데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만약 누군가가 길가는 나를 붙잡고 도망가지도 못하게 강요하면서 자꾸 내게 뭔가를 가르친다면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경찰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그저 미디어에 자신의 주장을 게재하는 것이 왜 나의 분노의 원인이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주장에 관해 관심이 없거나, 동의하기 힘들다면 넘겨 버리면 될 일이다. 


내가 뭔가 빠트리고 있는 걸까? 


3) 왜 우리 편 기를 죽이고 그래?


정파성의 논리이다. 박근혜의 탄핵이 진행 중이며, 최순실의 죄상을 밝혀 하루속히 이 나라를 바로잡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걸 위해서 중요한 관련자인 정유라를 JTBC 기자가 신고해서 잡았으니 좋은 일인데 그걸 가지고 왜 뭐라 하느냐는 입장.


이 주장은 너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반론을 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일단 당신이 어떤 정파에 속해 있건, JTBC는 당신의 편이 아니라는 점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언론사는 어떤 정치세력의 편이 되면 안 된다. 


JTBC라는 언론사를 같은 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더 문제다. JTBC가 우리 편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편에게 유리한 일을 해줬으니 그 행동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나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사고방식과 “나에게 뇌물을 줬으니 저 사람에게 한 자리 줘야 되겠다”는 사고방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편에게 유리하건 불리하건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따져볼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문명인의 기본자세다. 


4) 종합


이 모든 자잘한 이유들을 뒤섞어서 종합적으로 JTBC가 옳고 JTBC 소속 기자의 행동을 비판하는 당신의 주장은 틀렸다는 주장이 있다. 이게 제일 많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대체 박상현 이사가 왜 이 행동에 대해 “보도 윤리” 문제를 들어 지적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지점이 바로 박상현 이사의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박근혜 탄핵 사태를 맞이해 이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JTBC를 칭송하는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다. 저들이 잘하고 있지만 이건 잘못했네, 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당장 “네가 뭔데.. “라는 반박을 삿대질과 함께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심지어 박상현 씨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판단했을 때 JTBC가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도 않다. 추적 취재 중인 기자가 취재 대상을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그 체포 과정을 단독 보도할 때, 신고를 했다면 보도하지 말거나, 보도를 하려거든 신고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기자의 선택을 비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 선택은 우리 언론계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주지 않겠냐는 “우려”를 할 뿐이다. 충분히 논의를 해 볼만한 주제를 제안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논의로 받지 못하고 대뜸 화부터 내는 사람들은 좀 자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 “자제”가 절대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꺼낸 사람에게 용기 있다는 칭송을 한 것이다. 뭐 예상대로 욕을 엄청나게 드시고 계시지만, 그래도 진지하고 정중하게 의견을 받아 고민하는 분들이 무척 많았다는 점을 보며 희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제 서론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제? 겨우? 여태 뭘 한 거임? 아놔… 


보도 윤리


보도 윤리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이번 사안을 표현하기에는 문제가 좀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기자의 상황 개입에 관한 저널리즘의 윤리적 기준”정도가 적절할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기자는 관찰자가 되어야 하는가, 선수가 되어도 괜찮은가 하는 질문이다. 


언론 전공자들은 이 문제를 들으며 대뜸 저널리즘 윤리부터 떠올리겠지만, 나는 양자역학부터 떠올렸다. 세상을 구성하는 진리에는 양자역학이 훨씬 더 가까울 것이라는 점도 밝혀 두자. 


과거 뉴튼 시대의 물리학이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가 세상을 지배했을 때에는 과학자들은 두껍고 굳센 유리창 뒤에서 세상을 관찰했었다. 관찰 대상인 물체들의 운동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면서 그 운동의 법칙을 추적했다는 얘기이다. 뉴튼이 그렇게 생각을 했고, 그 이후 약 200년간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의하면 이 우주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대상에 개입하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본다는 것은 이미 대상과 내 시신경 사이에 광자가 전달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그 이전에 내 몸이 유발하는 중력장이 대상의 운동을 왜곡시킬 것이다. 


관찰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고 관찰하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연이 원래 그렇게 되어 먹은 것이다. 날아가는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게 그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관찰 대상과 관찰자가 분리된 세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어딘가에 내전이 발생했는데 그걸 취재하러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메이저 언론사 기자가 그 현장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향을 주는 일이다. 이 기자가 어떻게 현실과 분리되어 “관찰자”의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물론 기자 본인이 직접 신고를 하고 체포 과정을 찍는다는 것은 좀 너무했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원칙을 심하게 훼손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과연 한 기자의 입장에서 기자로서 지켜야 하는 저널리즘의 원칙이 우선인가? 아니면 공화국의 시민 유권자로서의 의무가 우선인가? 


만약 이 기자가 저널리즘의 원칙을 무시하고 공화국의 시민의 의무를 선택했다면 그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극단적인 논리적 연역을 한다면 해당 기자의 행위, 외국에까지 쫓아가 정유라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유지까지 방문하고 침범하는 행위는 자경단의 경계에 육박하는 위험한 행위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기자의 선택이다. 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은 해당 기자가 그런 선택을 내리기 이전에 저널리즘의 원칙에 대해 알고 있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선택한 것인지 하는 부분이다. 이 과정만 있었다면 그 판단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JTBC는 기자들에게 저널리즘의 원칙보다는 공화국의 시민의 의무를 우선하라고 가르치나 보다 하는 정도? 그 선에서 멈출 생각이라는 얘기이다. 


생각보다는 싱거운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저널리즘의 원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의무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그 원칙이 다른 원칙들과 상충할 때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지에 관해서는 기자 본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름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내 입장, 즉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케바케일 수 있겠지만 나는 공화국 시민의 의무 같은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이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보도를 할 때 더 심각하게 윤리적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어떤 회사의 주식에 투자를 해 놓고 그 회사에 대해 칭송을 한다거나, 자신이 산 땅의 지가를 올릴 수 있는 정책을 칭송한다거나 하는 짓,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한 배격과 처벌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 또한 관련된 오해를 받은 기억이 나는데, 비트코인이라는 대안 화폐에 관심이 생겨 몇 차례 관련 글을 올리고 해외의 유수한 비트코인 관련자들을 초빙해 이벤트를 열고 했더니, 당장 내가 무슨 비트코인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소문이 돌고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즉, 비트코인을 많이 사놓고 가격이 오르게 하기 위해, 투자자를 유도하기 위해 굉장히 호의적으로 평가를 하는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 


아주 간단하게 해명할 수 있다. 난 뭐 어딘가에 투자할 만한 자금 여력이 전혀 없는 가난뱅이 글쟁이이며 저런 짓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물론 안 믿으면 할 수 없지만 좀 믿어 주시라. 


어쨌거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위를 내가 했다고 오해를 받는 상황이라니, 한편으로는 좀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끔찍한 기억이기도 하다. 


문제제기가 필요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박상현 이사의 글에 담긴 주장을 대중을 상대로 전개하는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현실이라고 본다. 사실 난 이 얘길 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최대한 선의를 담아서 해석하자면 이것은 신뢰의 부족 문제이기도 하다. 워낙 꼼꼼한 악당들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던 사회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것도 좀 과장된 경향이 있기도 하다. 


즉, JTBC가 지금 부당한 정권, 아니 이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하지, 미친 정권을 침몰시키고 있는 중인데, JTBC에게 뭔가 좀 비판을 하는 것 같은 소릴 들으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으레 정권이 배후에서 뭔가 관여를 하는 어용 흑색선전인가 하고 놀라는 것이다. 


특히나 야당 지지자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요즘엔 여당 지지자들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온갖 루머가 돌아다닌다. 특히나 그 노년층이 즐긴다는 카톡 단톡방은 무슨 젖과 꿀이 흐르는 음모론의 천국인지.. 


그냥 조금씩만 더 담담해졌으면 좋겠다. 세상은 그렇게 급박하지 않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게으르다. 


JTBC 기자의 언론 보도 윤리를 지적하는 글이 나오면, 그저 오래된 저널리즘 원칙 문제 얘기하는구나, 하고 하던 일 계속하면 된다.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거나 하면 뭔가 배운 거 정리도 할 겸 한 번 읽어 보고 동의하면 잘 읽었다고 댓글 달고, 아닌 거 같으면 그냥 무시하면 된다. 논쟁을 하고 싶으면 최대한 정중하게 내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근거를 대며 설명하면 된다. 화들짝 놀랠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면 악플을 달아 트롤을 먹여 살리지 말고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게 왜 안 되는 지도 잘 알고 있다. 키보드 워리어 생활이 십 년을 넘어 이십 년에 육박하게 되자 이젠 이런 얘기도 하기가 지겨워진다. 아니 이십 년이 뭐야, 케텔 코텔 하이텔 시절까지 치면 삼십 년인가?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안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 사안에 대해 내가 정리된 식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거리낌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제기에 관해서는 사회가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문제제기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면 그냥 묻히면 되고, 그게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한 가지 작은 문제를 고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사회니까 말이다. 


문제제기 자체를 문제 삼지 말자. 그건 또 하나의 언론 탄압이 되고, 남의 의견을 큰 소리로 억압하는 행동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악의적인 모함이나 누군가에 대한 공격이라면 상황은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일단 상대의 의견을 선의로 먼저 해석하는 룰도 같이 지켜주면 더욱 좋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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