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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09. 2024

어쩌다 샤먼 코리아?

대체 무슨 일이람.


부산국제영화제도 지난 어느날 광복동에  나갔다가 낯선 풍물을 만났다.

이맘때의 분위기있는 거리를 전처럼 돌아보고 싶어 저물녘 바람 부는 광복동과 남포동을 걸어 다녔다.

그러다 과거엔 본 적 없던 의외의 정경을 접했던 것.


언뜻 포장마차 같은 자그마한 부스 가건물이 도로 한가운데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간이 대폿집 혹은 오뎅집인 줄 알았는데 역학 보는 자리이거나 신점치는 부스들이었다.

요즘 조류가 왜 이렇게 흐르는지 모르겠으나 시민대학 강좌에서도 주역과 명리학이 가장 핫한 인기과목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 광복동의 명소 비프, 영화의 거리와 연결된 번화한 이면 도로에 점집이 빼곡했다.

영도다리 인근에 몰려있던 점집들이 이웃으로 동시에 옮겨앉은 건 아닐 텐데 희한한 일이다.

물론 영도다리 밑 허름한 하꼬방에서 늙어가던 점바치와는 달리 이곳 점성술사들은 거의가 파릇한 신세대다.

점을 보는 방식이며 종류도 예전보다 한층 더 다양해졌다.

디지털 시대답게 정초에 토정비결 보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아예 직접 운수를 풀어보는 앱까지 나왔다.

태어난 연월일과 시각을 입력하면 알아서 데이터를 뽑아 즉각 점사를 알려준다.

얼굴 사진을 정면으로 찍어 올리면 즉석에서 관상도 봐준다.

애들조차도 얼마든지 제  손안에 든 스마트폰으로 사주를 보고 일진을 따질 수 있는 요상한 세월이다.

오행에 근거한 사주풀이는 확률이고 통계치이기에 직관이 아닌 폭넓은 통찰력에 의한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위험한 해독학을 아이들이 재미 삼아 즐기는 세상이며 그럼에도 점집은 호황으로 수입 쏠쏠하다고 한다.




텐트 안에는 인도의 향불같은 불빛 희미하고 자색 연기 신비로이 피어오르는데 점술사 마주한 손님이 한 둘씩 앉아 있다.

재미나 호기심으로 가벼이 손금, 관상, 사주, 신점, 타로점을 보는 사람들.

전자게임 한편 휘리릭 하고 훌훌 일어서 나오듯 그들 표정은 심각하다기보다 가볍디 가벼워 보인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학적인 확실한 근거부터 들이미는 젊은 층 발길이 스스럼없이 점집으로 향하다니.

이런 풍조를 부채질하듯 방송매체마저 버젓이 운세 보는 프로를 예사로이 내걸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가 셀럽 유튜버로 뜨면서 인생 상담도 해주고 방울 흔들며 접신하는 모습조차 여과 없이 비춰준다.

전에는 점집을 다녀오면 대개는 숨겼으나 근자엔 점술가를 인생 항로의 카운슬러라고 부르는 이도 있을 만큼 여러모로 달라진 위상.

아무래도 이 현상이 희한하고 기묘하게만 비친다.


하긴 고명하신 나리님들 사주풀이 들으며 시원한 카타르시스 나아가 대리만족을 얻기도 하지만.

한참 전 정신과 전문의가 전생 여행을 펴내더니 요즘 들어 정신과 여의사가 낸 명리심리학이 세간의 화제라고 한다.


최근 아예 무속공화국 스캔들이 떠도는 얄궂은 세태이니 말해 무엇하랴만.



대관절 세상이 왜 이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외로이 뜬 초승달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피난시절도 아니다.

당시야 모든 게 불확실한 내일이니 답답한 심정에서 영도다리 밑에 촘촘 박힌 점집을 슬그머니 찾았을 테니 이해는 된다.

피난길에 손 놓친 자식 하마나 찾을까 실낱같은 기대 걸고 복채를 올렸으리라.

행상으로 푼푼이 모은 돈 한탕 뻥튀기해도 괜찮겠나 물어보고도 싶었으리라.

집집마다 이산가족 한둘은 있었던 그런 불행한 시기가 이젠 아니다.

일상다반사로 끼니 굶다시피했던 가난한 5~60년대도 물론 아니다.

지금은 제각금 아쉽거나 부러운 게 없이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

배곯기는커녕 각국 명품요리 입맛대로 골라 먹고 영양과다로 다이어트하며 사는 세상이다.

말하자면 군복에 검정 물들여 입고 산 우중충한 시대가 아닌 밝고 화사한 원색 시대가 지금이다.



사람들이 점집을 찾는 건지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

나 역시 십대 때,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신탁을 기다리듯 진지하게 공줄을 잡았던 적이 있긴 있으니까.

요령 소리에 최면 걸린 듯 영험한 조언자 왈, 살(殺)을 풀어야 한다면 기꺼이 산신굿이라도 할 태세였으니까.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나약할 때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술에 매달려 모호한 점괘조차 솔깃해지며 쉽게 거기 매몰돼 버린다.

기나긴 삶의 여정 걷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저런 억장 미어지는 일 겪는다.


오죽하면 인생은 고해라 했으랴.

꽉 막혀 길이 안 보이거나 막다른 절벽 앞에 설 때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너나없이 너무 답답하고 막막해서, 기막혀서, 환장하겠기에, 한숨 삼키며 찾게 되는 점집에서 일종의 위무를 받기도 한다.

허나 장삼이사 고달픈 민초들 말고도 고관대작 역시 알음알음 물으러 온다고 한다.

한바탕 선거 바람이 불면 대운 들었나 점쳐보고 싶어 높은 신분 슬쩍 위장하고는 비밀스레 사주를 디민다고.


큰 기업주는 더 큰 투자처 저울질해보려 찾아오고 중소기업 사장은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드나든다.

잘나가는 회사원은 승진 시기 앞두고 용한 집 수소문해 가능성 타진해 본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저마다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이에 대처하거나 방비하려는 욕구가 일게 마련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약한 자의 안간힘 섞인 방어기제 일 수도 있겠다.

곧 죽어도 솟대 같은 자존심 지키며 스스로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방편으로 삼을 수도 있다면 일면 바람직스럽다.

점사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다면 나름 긍정적 효과도 있으니 미상불 나쁘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절기 운행과 인간사 사이에는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자연스럽게 믿는 동양문화권에서 산 우리다.  

하여 불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도 한국인에 접목되면 마찬가지로 요상하게 변질된다.

별 거부감 없이 미신이라 터부시하는 기복 신앙 안으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마는 인간의 나약함.



사주팔자는 정해져 있다지만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해 나갈지는 오롯이 자신이 결정할 몫이다.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시피 내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

자아(自我)가 약한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로 주어진 현실을 제어하거나 타개해나갈 자신이 없을 때가 더러 있다.     

불가항력적인 운명과 직통으로 마주치기도 하는 인생 역시 주변에서 가끔 보아왔지 않던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치거나 막다른 벽에 부딪치는 등 예기치 못한 좌절감 앞에 속수무책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우리,

점성술이 번창하는 사회란 어느 면인가 분명 건강치 못한 사회라는 걸 반증하는 건 아닐까.

결국 샤머니즘에 빠진다는 자체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불안의 그림자가 반응하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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