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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은 가고 없어도

by 무량화 Jan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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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 날리는 오후, 묵은 책을 펴 들자 갈피에서 사진 한 장이 하르르 떨어졌다.

엄마 앞에 앉은 딸내미가 아장대는 세 살짜리였던 1980년 오월 어느 봄날 사진이다.

당시 다른 동인들은 대개 사십대라 막내까지 학교 다닐 나이였으나, 나를 비롯 두엇만 비교적 젊은 삼십 초반이라 딸내미를 데리고 모임에 다녔다.

그즈음 막 페미니즘이 움터오던 시기라 자기 일을 갖고 활동하는 동인도 있어 약사, 교사, 유치원장, 사업가로 맹활약하던 여장부도 한 분.

하지만 대부분은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 불리는 평범한 전업주부이나 그중에는 대구시내 유명인사인 학장 부인, 의사 부인, 사장 부인도 있긴 했다.

후에 소설가도 배출되었고 시조시인으로 가곡 노랫말을 쓴 이도 탄생했으며 수필가 시인 여러 명이 저 속에서 나와 대구문단의 주추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묻혀졌던 본디 자기 이름을 되찾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하긴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이름자, 애착을 가질 만큼 어감이라도 좋으면 또 모르는데 딱딱하고 촌스런 데다 아무리 봐도 현대감각 혹은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나의 이름.

충청도 양반이신 조부님의 고지식한 법도대로 여식에게도 돌림자를 넣어주신 덕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일 때 담임의 권유로 아이와 함께 백일장에 처음 참석했다.

원고지와도 첫 대면이었으며 정해진 주제에 따른 글을 써보기도 그날이 첨이었다.

그렇게 대구 KBS주최 예술제에서 우연히 수상하며 글과 인연 닿았고 방송사 주선으로 수상자들끼리 모여 결성된 문학동인 '오월회'가 있어 동참했다.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라 하였다.

그랬다, 이때를 기점으로 글쓰기에 심취, 글과의 열애에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당차게 문학을 해보겠다고 작정했다면 끈기 부족한 난 중도에 손을 들어버렸을 게다.

그처럼 나에게 글쓰기는 부담 아닌 신명 나는 놀이이며 나이와 상관없는 낭만 어린 도취이자 열락이었다.

어디까지나 글은 수수한 이웃, 무간한 친구로 족했으며 나아가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마음의 산책지이길 원했다.

내게 있어 글은 갈망의 연인인가 하면 자유로운 향락이었고 기꺼운 도락이며 구원처이기도 했다.

피 말리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투철한 문학정신의 결여를 꼬집어도 별반 개의치 않았다.

제 그릇과 역량 등 주제파악 옳게 못하고 대책 없이 몰두해 미치기보다는 그냥 문향(文香) 언저리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싶을 따름이었다.

글이 설령 나를 먹여 살린다 하여도 난 그에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글 쓴다는 자체가 마냥 좋아 그저 즐기고 싶을 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써온 글을 돌려 읽던 동인들 이제는 거의가 고희 훌쩍 지나 상노인되었을 터다.

세 분은 이미 하늘여행 떠났고 팔순 넘긴 분이 대부분이니 인생무상, 돌아보니 참으로 잠깐 사이다.

연말이면 동인지 한 권 묶어 세상에 내놓고 자축하며 표정 상기되던 열정도 옛일.

'더듬어 지나온 길 피고 지는 발자국들... 그렇게 걸어온 길 숨김없는 거울에는...'가사처럼 똑 그렇다.


옛날은 가고 없지만 그래도 켜켜의 세월이 우리를 이만큼 원숙하게 다듬어주었음에 감사한다.

바라던 바를 이뤄냈다는 성취감도 소중하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동기를 부여해 줬던 동인들.

남은 오월회 동인 모두들 오월처럼 생기 차고 보람되고 의미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생각과 지혜 모두 다 여물게 채워지고 웅숭깊어지고 음전하게 넓어졌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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