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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옥이 문옥이

by 무량화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안다. 죽을 날 머지않은 팔십도 훌쩍 넘은 그들이다. 이제와 막말 실컷 퍼붓고 악다구니 마구 쏟아놓는다 해서 앙갚음이 될까. 내 입만 험해질 뿐 그 늙은이들에 대한 분노심이 해소될 리도 만무다. 그럼에도 한바탕 울분 쏟아놓고 질탕하게 욕설이라도 해대야겠다. 요즘 브런치에 게재된 글들을 읽다 보니 그래, 더 쌓아두지 말고 털어버리자! 식의 용기가 생겼던 터.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가족사의 치부이기도 한 내밀한 고백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놓는 데 자극을 받았던 셈이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성토가 앞서야 할 일이긴 하다. 문제는 아버지였으니까. 아버지의 바람기는 진작부터 워낙 심했던 모양이다. 고모가 한숨을 쉬며 우리 올케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말끝 흐리곤 했는데 그땐 무슨 소린 줄 몰랐다. 집안에서 우려했던 대로 아버지는 거리낌은커녕 보란 듯이 첩실을 들이고 딴살림을 차렸다. 첫번째 여자는 자식이 둘씩이나 딸린 과부였다. 상옥이와 문옥이란 아들들 이름만 알뿐 첩살이하는 녀자의 성조차 모르기에 첩실은 그저 ㅇㅇ에미였다. 내가 그들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그믐달이 뜬 어느 한밤이었다. 내 손을 잡고 힘없이 걷던 엄마가 전매청 옆의 낯선 함석집 문간방 문 앞에 이르자 멈춰 섰다. 일곱 살짜리가 뚫어진 창호문 틈 사이로 목도한 것은 30대 남녀와 여나믄 살 먹은 두 애들이었다. 30대 남자는 내 아버지였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외갓집에서 살았다. 자손을 두지 못한 둘째 외숙댁에서다. 홍역도 치르기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다. 젊은 시누이야 또 자녀를 생산할 수 있으니 양자 삼아 데려온 날 외숙모는 애지중지 돌봤다. 소공녀처럼 예쁘게 치장해 주고는 꽃 보듯이 귀애했다.. 여늬 부모 못잖은,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외숙과 외숙모로부터 듬뿍 받으며 자랐다. 방앗간을 운영하던 외숙네는 50년대 살림이라도 매우 윤택했다. 대처인 인천으로 기계부속이나 석유 등을 구매하러 다녀올 적마다 외삼촌은 한아름 선물을 안겨줬다. 바둑껌이며 미루쿠랑 왕사탕, 물색 고운 원피스며 꽃핀, 당시로서는 진귀한 장난감 등속을 사 갖고 오셨다.


두 분의 지극한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살던 나는 급전직하 서글픈 환경에 처해졌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어린애라 해도 그건 자동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비극의 냄새였다. 슬펐다. 아무 죄 없는 엄마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서 내 손을 꼭 잡고는 집으로 향하던 그 밤. 나도 입을 꼭 다물고 고개 숙인 채 타박타박 걸었다. 순간 눈물이 나올 거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 앙다문 입 속에서 혼잣말이 새겨졌다. 아버지 나빠!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리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까. 두고 보자, 내가 크면 니들 모두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반드시 응징하고 말 거야. 그 당시 어린애라 증오심, 복수심, 저주, 응징 같은 단어는 몰랐으리라. 그렇다 해도 시퍼런 비수 한자루 가슴 깊이 숨겨뒀던 것만은 틀림없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상옥이 에미년은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금세 다시 돈 많은 물주 놈을 꼬셔 버젓이 같은 당진 읍내에서 또 다른 첩살이를 시작했다. 아들 둘에 구씨 핏줄의 딸년 하나 더 혹을 달고도 뻔뻔스럽게. 그때쯤이면 제법 머리통 굵어진 아들놈들인데 지 에미 천박한 꼬락서니를 묵인 내지는 방조하는 듯 시시덕거리며 함께 산다는 게 인간 같지 않았고 이해도 되질 않았다. 아무리 골통이 비었다 해도 중고등학생이 되면 옳고 그름 정도의 판단은 능히 하련만. 참 가관이다 싶어 내심 잡년에 쌍것들 짓거리하고는... 비웃곤 했다. 그들은 양심이며 윤리 도덕을 진작에 버린, 인간이기를 포기한 말종들이라 치부해 버렸다. 한없이 경멸한 인간 군상이지만 그래도 더러운 돈이든 뭐든 간에 첩질 하는데 이골 난 에미년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삼류대학이라도 나오고 버젓이 사회인 노릇을 하긴 한 모양이다.


아버지란 작자의 이후 행적은? 그렇다고 난봉꾼 오입질이 멈출 리가 있으랴. 태생적으로 술을 못하는 위인인지라 두 번째 들어앉힌 첩실은 다방 여자였다. 술김에 저지른 실수라면 정신줄 놓은 상태라 그러려니 하겠지만 맨 정신에 그따위 짓거리를? 해서 아버지 행태는 더 구역질 나고 징하다 못해 끔찍스럽기만. 어찌어찌 목재소를 일으켜 세운 다음이라 아버지는 읍내 다방을 인수해 다방에다 새살림을 차렸다. 거기서 줄줄이 애들이 태어났다. 서류상으로는 내 엄마 밑에 딸린 자식이지만 난 단연코 한번도 그들을 형제자매라 여겨본 적이 없다. 그 여자는 첫딸 이름을 따 자연에미로 불렸다. 상옥이 에미년처럼 긴 호칭도 아니었다. 아마도 처음번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된통 덴 터라 그때 생긴 상처의 딱지가 단단해서일지도. 그렇게 엄마는 언니와 나, 딸만 둘을 둔 채로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았다. 온갖 간난과 신산, 정월달 매화처럼 초연히 견디며 산 엄마. 볼꼴 못 볼 꼴 묵묵히 수용하며 모든 고통 속으로만 삭이느라 엄마는 한번씩 위경련으로 심하게 아팠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고 했다. 그러게 선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엄마 선종 후 만나는 일가붙이마다 엄마같이 산 양반이 천국가시지 않으면 누가 가겠냐고 했다.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후 연면하게 후대를 통해 나오게 된다. 2004년 엄마는 86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아버지는 지은 죄 막중해서인지 명이 영 짧아 80년대 암으로 고생하다가 눈을 감았다. 칠십도 못 채우고 떠난 아버지를 난 참 오래 용서하지 못했다. 아버지 환갑 때 갔다가 돌아오며 전화로, 속에 앙금진 분노의 화산 기어코 폭발시키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층 더 독한 말로 심장 후벼파는 상처를 입혔어야 했는데, 그 일로 두고두고 회한이 될지라도 그랬어야 했는데. 더구나 운명에 임박해서 갔을 때 아버지 입에서는 신음소리만 새어 나올 뿐 듣고자 한 한마디는 종내 듣질 못했다. 네 엄마에게 미안하구나, 란 그 한마디. 미안하다는 그 말만 했어도 마지막 가는 길이니 지나간 모든 거 용서하고 편히 가시라 할 수 있었을 텐데. 성당 기도문 중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란 구절을 외울 적마다 뜨끔했다. 성당 다니며 한 십 년 여가 지나서야 겨우 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일이다. 언니와 통화를 하다가 난생처음 듣는 어떤 얘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언니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애기 때 외가로 갔다가 여섯 해만에 돌아온 집이다. 그 중간에 있었던 사건을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말로 무상심하게 말했다. 애들이 없던 집에 상옥이 형제가 와서 살게 돼 굉장히 좋았었다는 소릴 했다. 잠깐만, 뭐라고? 그것들이 집에 들어와 산 적도 있다고? 순간 열이 확 뻗쳤다. 평소 냉정한 편이면서도 성미 급하고 다혈질이라기보다는 열혈성 기질이다. 개빡쳤다더니, 자동으로 개새끼 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애어른 할 거 없이 죄다 미쳤군, 미쳤어! 그 판에 좋다는 소리가 나와? 엄마 생각하면 그딴 소리가 나오냐구! 기가 막히기도 하고 마구마구 화가 나 흥분된 목소리는 떨렸다. 내 원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오네.


언니는 잠깐 멈칫하더니, 내가 어렸는데 뭘 아니? 철없는 어린애인데. 그러자 더 열불이 터졌다. 철없어도 그렇지, 본능적으로 그런 건 아는 일 아냐? 아무리 첩이 예사롭던 오십 년대라도 미개한 원시부족도 아니면서 한집에서 두 여자를 거느릴 생각을 하다니. 이런 개 같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분노가 재점화됐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벌렁거렸다. 첩년을 끌어들인 놈도 나쁜 놈이지만 지 에미 첩살이하는 데 딸려온 개새끼들이 좋았다구? 당시 엄마 나이 서른이야, 한집에서 첩년 하고 살며 그 새끼들 처먹을 끼니까지 해서 바쳐야 하는 엄마는? 나쁜 연놈들 육욕에 눈멀어 그 안에서 새끼 만든 그 죄 어찌 받으려고 썅! 몹쓸 잡것들까지 용서? 어림도 없다.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그런 새끼들도 편히 잘 살게 놔둔다면 그건 아니지. 예수 가라사대 누구도 단죄하지 말라고? 난 성인군자가 절대 못되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긴 당사자들이야 죽어 백골 된 처지임에도 이 마당에 화를 내는 건 소용도 없겠지. 그러나 늙어빠졌지만 아직 건재한 상옥이 문옥이 개새끼라도 마음껏 능멸하며 잘근잘근 씹어제켜야 분이 가라앉을 거 같았다. 그래야 노기가 조금치라도 풀리겠지.


나로선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엄마는 생전에 그 비슷한 소리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우리 자매는 엄마로부터 욕은커녕 꾸지람 한번 듣지 않고 자랐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원망한다거나 푸념하는 말 역시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아버지를 갈구며 나쁜 소리라도 하면 에이~그러지 마, 말리던 엄마다.

그리 착하디 착한 조강지처에 대해 지아비로서 눈곱만치라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기본양심도 없는 철면피다. 아니 인간에 대한 예우로서도 그럴 수 없는 폭거를 저지른 악의 화신이다.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이다. 엄마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도 아니잖아. 그럼에도 어떻게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한세기 전 조선여인처럼 몸에 익혔을까. 매사 드러내놓고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엄마. 어찌 그리 참고 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남편에 대한 불평이나 탓을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칠거지악이란 개소리가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였다 해도 도대체 바보처럼 무조건 말없이 참고만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맏며느리였던 엄마가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다는 것도 작은 숙모의 푸념을 듣다 알게 됐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바보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나는 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묵묵히 순종하며 인내하며 희생만 하는 엄마가 답답해 화났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저항하거늘 하물며 사람인데 속도 없느냐고,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나는 열을 내며 씩씩거렸다. 그렇게 평생을 시종 겨울 한복판 모진 삭풍 속을 걸어가야 했던 엄마. 그에 대한 반작용일까.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이처럼 날마다 강박적으로 미주알고주알 별 걸 다 들춰내 수다 떠는 걸지도. 죽어서 가는 천당과 지옥은 살아생전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은 분명한 위안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느닷없이 전혀 상상도 못했던 그자들의 비열한 악행을 알게되면서 왕창 치솟은 스트레스 지수. 이러다 나부터 큰 탈 나겠기에 심호흡부터 하고 냉수 한 컵을 마셨다. 맞네, 글쓰는 사람 누구나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하더니 맞긴 맞나보다. 아무튼 속내 뒤집어 실컨 지껄이고 나니 그나마 환기는 좀 듯 하다. 신앙만이 아니라 글 역시 심신의 치유제이자 구원처인 것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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