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별장
운동 삼아 금강공원 올라가는 중이었다.
마침 문이 열려있기에 동래별장 안을 구경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천장의 고급 한정식집으로 돌잔치나 상견례 또는 결혼식 장소였던 곳이다.
영업을 언제부터 그만뒀는지 대문 허술하게 닫힌 채 흉가처럼 웅크리고 있던 칙칙한 건물은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향나무 등 정원의 우거진 수목들로 해서 잔뜩 그늘진 집안이라 밖에서는 거의 시커먼 폐허터로 보였으니까.
이날 따라 정원수 전지 공사를 하느라 문이 열린 터라 잠시 마당 안으로 들어가 사진 몇 장 찍었다.
다시 금강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붙잡은 건 웅장한 건물을 둘러싼 높은 담장이었다.
더 정확히는 담장 축대를 쌓은 바위들로 웬만한 집 뜰에 장식 삼아 세워둘 만한 돌들이라 순간, 울분 치받쳐 올랐다.
분명 이 바윗돌들은 숲 그윽한 저 금정산에서 마구잡이로 끌어다 박았으리라.
암산에 속하는 금정산이라 고당봉 정상도 바위 무더기이지만 산자락 어디나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정상에 올라가면 평평한 고지에 길게 늘어선 석성인 산성이 기다리듯 어딜 가나 걸리는 게 크고 작은 바위다.
금강공원 역시 일부러 꾸민 조경지처럼 여기저기 잘 생긴 바위가 온데 널브러져 쉼자리며 계곡 사이 다리 역할도 한다.
제대로 금정산 산행을 하지 않더라도 초입부터 동물 형상의 바위는 물론 초가집 한 채에 해당되는 거대한 바위 구경이 예사롭다.
안 가본 금강산이지만 바위 군으로 치자면 만물상이 따로 없을 정도인 금정산이다.
김일성 기리는 문구 벌겋게 새겼듯 여긴 거대한 바위에 일인들이 기념판 만들어 한자와 일본어를 섞어 무어라 줄줄 새겨놓기도 했다.
제 집에 들어다 놓기에는 바위가 너무 거대하니 여럿이 작당해 희희낙락 모여서 젠체하며 유희를 즐긴 표식들이다.
왜인들은 고상한 척 점잔 떨며 문장을 새기라 지시했을 테고 허연 무명옷차림 조선인은 굽신거리며 정을 들고 사다리 올랐으리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글씨를 조심조심 각자(刻字) 하며 망치질할라치면 석수장이 이마에선 진땀 흘렀을 텐데 지금은 몇몇 자 뭉개져 버렸다.
금강공원에서 몇 발짝 겨우 옮겼는데 이번엔 바위 표면에 똑 고른 구멍이 나있는 걸 수차 목격한다.
암석을 떠내거나 자르려 절단 공구를 사용한 흔적들이다.
터널 뚫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우리이나 당시야 자연암반을 욕심대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이었으니 분명 일제 때 한 짓일 터.
바위 덩어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제멋대로 이리저리 마구 대하게 한 그게, 주권 빼앗긴 나라가 당해야 할 모멸감이자 굴욕이다.
일제에 의해 금수강산 수탈 당한 곳이 어디 여기뿐이랴만은 제국주의 탓하기 이전 힘없어 나라 잃고만 우리가 못난 탓이다.
지금이라고 국제관계 달라진 건 없다.
어리석은 위정자가 바보같이 굴다가는 힘의 균형 무너지며 주권 잃고 결국 제나라 국민은 물론 산천이며 바윗돌조차 지켜내기 어렵다.
동래별장은 한국 근세사의 비극과 맞물려있는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부산 3대 부호의 하나였던 일본인 하자마 후사타로의 별장으로 온천장에 지어졌다.
대지 면적 칠백여 제곱미터에 건평 삼백 제곱미터에 달하는 지상 2층 건물이다.
일식 목조 양식의 기와지붕에 회벽으로 마감했으며 정원은 전통 한국식과 일본식을 혼합했다.
대문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후사타로의 이력이 상세히 적혀있다.
와카야마 출신의 장사꾼인 그는 오사카에서 상점 점원 일을 하다 스물셋에 지배인으로 부산에 왔다.
독립해 수산업과 무역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삼십 대 후반 부동산 왕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부산토지주식회사 사장까지 꿰찼다.
예나 이제나 땅이 자산의 근본이 맞긴 맞나 보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민생이나 계속 하락하는 청년실업은 안중에도 없이 좌우 갈등의 골 깊이 파헤쳐대는 정치꾼들은 국민들 염장만 지른다.
요새 또 회자된 백현동 땅의 용도변경 후 투기 사건도 그렇고 국회의원 중 다주택자가 육십여 명에 이르듯, 땅이 곧 자산의 근본임을 입증한다.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대로 가장 손쉬운 재산증식의 지름길이 예나 이제나 땅 사재기라니...
다시 동래별장, 지금이야 별볼일없이 허름해 보이는 목조건물이지만 깔고 앉은 대지만도 엄청나 약 이만여 평.
1900년대 초 10만 원의 거금을 투자하여 별장을 짓고 금정산 송림으로 앞뒤 정원을 가꿨으며 많은 돌을 날라다 연못 꾸민 일본인은 당대 소문난 부자였다.
당시 얼마나 잘 지은 건물이었으면 일본 왕족이 부산 방문 시 여기서 머물렀는데, 독자적인 탕원(湯源)이 있고 바윗돌 파서 만든 욕조까지 있었다고.
개항 후 왕래가 잦아진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을 즐겨 애용했다.
동래온천은 다리를 다친 학이 머무르며 치유했다 하여 백로 온천이라 불리며 신라 적부터 왕들이 드나들던 유서 깊은 온천지다.
그 명성이 일본까지 알려져 한국 여행 1번지로 꼽았다는 동래온천이다.
더구나 1915년 부산진에서 출발하는 전차 종점이 온천장 입구라서, 동래지역 전체가 최호황기를 맞아 전성시대를 누렸다.
일본인 재력가들에 의해 온천개발이 활발해지며 이때 대규모 목욕탕, 여관, 별장 등 다수의 휴양 시설이 온천장에 등장하였다.
이후 70년대까지도 기생관광에 맛 들인 일본인은 물론이거니와 허파에 바람 잔뜩 든 이 땅의 토호와 한량들 유락지였던 동래별장.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집무실과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다가 적산가옥으로 개인에게 불하되었다.
6·25 전쟁 때에는 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로도 부산을 방문하는 유명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들르는 장소로 통했다.
1965년부터 고급 요정으로 탈바꿈하면서 한국을 찾는 국빈급 인사와 대통령도 부산에 오면 방문하는 명소였다고.
사업주가 여러 차례 변경되며 휴폐업을 거듭하다가 2000년 대중음식점으로 전환되었다 한다.
앞으로 또 어떤 업소가 될지 내 알 바 아니나 동래별장을 바라보는 심사가 여러모로 편치 않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