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에 있는 금강공원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금정산 숲 그늘 드넓게 일본인 히가시바라의 개인 정원으로 조성된 동래금강원이 모태다.
원체 기암과 송림 어우러져 풍치 좋은 금정산 자락을 다듬어, 거기다 동래읍성에 있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등을 이전시켜 꾸민 정원이다.
문화재 건물이며 석탑까지도 개인 집 조경용 소품으로 들어다 놨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겠나.
광복을 맞아 비로소 원위치 각각 되찾아 지금은 금정산 등반 출발지이며 시민들의 산책지가 된 금강공원이다.
가까이 있다 보니 자주 금강공원에 들어 숲 향기에 젖었다 오곤 한다.
정상까지 슬슬 산행을 하기도 한다.
산길 오르며 고마이 시선에 드는 사물 중 하나가 착실한 디딤돌 역할을 해주는 소나무 뿌리다.
바위 사잇길 돌들도 물론 험한 암석 잘 비켜가도록 도와준다.
강인하게 뻗어나간 뿌리를 보면서 한 사람의 생애를 곰곰 헤아려봤다.
나 자신도 다는 모르는데 타인을 온전히 알 수야 없지만 객관적으로 타 인격체를 짚어보는 외적 지표는 있다.
그간 지역사회에서 어떤 자리매김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난 세월의 이력과 현재 가족 관계도를 미루어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이 국장님은 아는 분 중에서 몇 안 되는 존경스러운 어른이다.
오래 가까이 지낸 사람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작은 흠결이라도 드러나기 마련이라 그만큼 인정받거나 존경받기가 쉽지 않다.
충청도 B시 시청에서 사회복지과 국장으로 정년퇴임한 후에도 여든이 넘도록 복지분야 현장을 뛰며 봉사를 하는 분.
갑남을녀 흔하디 흔한 이 정도의 이력만으로 특별히 존경심이 드는 데는 까닭이 있다.
현직에 근무할 당시 충남 공무원계의 여장부로 통하며, 모범적이고도 파워풀하게 대외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운명의 질곡을 넘어서서 흔들림 없이 미래를 탄탄히 개척해 나가며 성심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완주한 사람이 그녀다.
여성을 직장의 꽃 취급하던 세월에 홀몸으로 아들 키우며 사는 젊디 젊은 그녀에게 유혹이 전혀 없을 리 있었겠는가.
한 점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고 허점 남기지 않은 채 강인하게 대지에 두발 굳건히 디디고 산 그녀라 갈채를 보내는 것.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형제들과 살아온 고향을 그녀는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지금껏 지켜온 B시의 명실상부한 터줏대감이다.
공직생활을 하며 섬이 많은 지역 특성을 살려 비행장 건설안을 세부적으로 마련해 적극 추진할 정도로 스케일이 대단했던 그녀.
성사는 되지 않았으나 매사 열정적으로 남다른 사업안을 구상해 내는 그녀는 고교 학력이 무색할 정도로 워낙 지혜로웠다.
70년 초 지방 출신이면서 최고여성지도자로 선발돼 미국 연수를 다녀올 만큼 이미 발군의 실력자로 정평이 난 그녀였다.
눈에 띄게 탁월한 능력을 높이 샀기에 내무부에서도 불렀고, 도에서 모셔가려 해도 요지부동 고향에서 아들 하나 바라보며 팔십 성상을 살아왔다.
그녀는 또 하나의 큰 바위 얼굴이자 뿌리 깊은 나무였다.
이십 대 초, 같은 지역 중등교사와 결혼을 했다.
섬에 사는 남자의 부모는 결혼식 날 풍랑이 심해 부득불 참석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날 잡아 신행 인사차 섬을 방문하려 했으나 남자는 핑계를 대며 한사코 신행길을 미뤘다.
시간은 흘러 그 사이 아이를 갖게 됐다.
더더욱 섬에 들어가야 했다.
억지를 피워 기어이 세 식구가 시댁에 갔다가 그녀는 기가 막힌 상황과 접하게 됐다.
남자는 버젓이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B시로 돌아온 즉시 혼인관계를 무효화 한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자 호적만 그 남자 가계에 올려놓고는 남자와 절연한 채 자식을 홀로 키우며 살아왔다.
당시의 민법은 원칙적으로 친모 성과 본을 따를 수 없는 규정이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육십여 성상을 앞만 바라보면서 한평생 운명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세파 헤치며 누구 앞에도 의연했던 그녀의 한 생애.
소나무 뿌리처럼 단단히 부여잡은 '대지'와 같은 아들 하나 잘 키워 그녀는 며느리를 맞았고 손주도 보았다.
갈등 구조로 치자면 도무지 쉽지가 않은 고부관계인 홀시어머니에 외아들 며느리이다.
딸은 어디까지나 딸이고 며느리는 어디까지나 며느리란 말을 흔히들 한다.
아무리 사이가 돈독해 서로 잘해준다 해도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들 말한다.
그럼에도 삼대가 한집에서 화목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요즘 시대에 결코 흔치 않아 다들 부러워한다는 이 국장님 댁.
공무원인 아들 며느리는 더할 나위 없는 효를 다하며 손주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존경을 받는 할머니가 된 그녀다.
사춘기 손자조차 회로 엉킨 뇌피셜로도 할머니만은 귀히 모셔야 하는 신줏단지다.
고부간이지만 며느리는 과거에 직장 상사인 시어머니라 효심에 더해 공경심까지 보태게 된다.
허투루 대할 수 없는 국장님의 후광도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어머니에 대한 평판이 원체 교과서적 전범(典範)이다시피 공고한 시모님이니.
따라서 보통 고부관계 이전에 아마 이 점이 작용해서도 더더욱 공손하고 신실한 자부 노릇을 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도움 필요한 후배 길라잡이 되어 적극 이끌어주고 인연 소중히 여겨 인적 자산이 풍부한 그녀는 요즘도 사회단체의 협력자 조언자로 봉사를 한다.
그럼에도 늘 겸손한 그녀는 따스하고 자상하게 타인을 배려하고 성원하며 격려하는 게 아예 몸에 뱄다.
따라서 만날 적마다 희망찬 메시지와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는 분인데 나는 딱 세 번 자리를 같이 했을 뿐인 언니의 친구다.
검버섯 핀 손등은 고목 등걸이 됐으나 그녀라는 나무는, 그늘 넓게 드리우고 뿌리 멀리까지 퍼져 여전히 생명의 기운 두루 나눠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