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에 갔다가 이웃한 구룡포 마을까지 둘러봤다.
동해안의 그저 그런 아주 작은 포구였다.
포경업이 금지된 이래, 영일만 친구 노래가사처럼 거친 바다로 달려 나가 고래 잡을 일도 없어진 작금.
겨울철 별미라는 향토음식 과메기 외엔 별로 유별날 것도 없는 허접한 어항인 구룡포.
헌데 의외로 전체 분위기가 새빨간 동백꽃잎처럼 열기로 들떠있었다.
알고 보니 한때 최고 인기였던 KBS 드라마 촬영지라서 그 여파에 따른 관광특수란다.
주인공 동백의 자취를 찾아 뭇 구경꾼들이 쇄도한다니 지자체는 물론 상가주민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쏘냐.
도로변 전봇대마다 <동백꽃 필 무렵> 배너광고가 펄럭거렸다.
드라마 하나로 대박 난 관광자원이 된 곳은 구룡포 외에도 국내 여기저기 숱하다.
그렇다고 일부의 저급한 취향을 통속성으로 매도할 자격이야 물론 없다.
허나 과열현상 쏠림현상에 무작정 편승해 버리는 무뇌충 같은 대중들이 너무도 많아진 작금.
두뇌 똑똑하다는 백성인데 선동에 약하고 세뇌도 쉽게 되는, 일면 주관도 없고 개념도 없이 부화뇌동하는 사람 적잖다.
매스컴의 최면에 걸려 애먼 촛불 앞세운 채 부추기는 대로 대중들은 녹피에 가로왈,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른다.
아마도 내가 촛불이라면 시인 김귀례의 시 <촛불>처럼 발 구르며 성토라도 할 것이다.
나의 눈물을 위로한다고/ 말하지 말라/나의 삶은 눈물 흘리는 데 있다/너희의 무릎을 꿇리는 데 있다
......눈물 흘리지 않는 삶과 무릎 꿇지 못하는 삶을
/오래 사는 삶이라고 부러워하지 말라/작아지지 않는 삶을 박수치지 말라/나는 커갈수록 작아져야 하고/나는 아름다워질수록 눈물이 많아야 하고/
나는 높아질수록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음식점들은 <여섯 시 내 고향>이니 먹방 유투버니 백선생에게 발탁된 적 있다는 모리국수며 과메기 팔기 바쁘다.
한쪽에선 섣달 그믐날 가래떡 빼는 방앗간처럼 영덕대게 찌는 뿌연 김이 소담스레 올라온다.
뿌우~ 뱃고동소리 효과음 따라 선창가 재래시장에서는 생선회가 도매금이라며 척척 썰어진다.
공터에 줄지어 선 텐트바(Tent Bar)도 돈 못써 안달 난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뭔가 새로운 게 하나 떴다 하면 물결처럼 몰려다니는 대중들은 떠드는 대로 줏대 없이 뭉텅 낚싯밥을 문다.
혹세무민 하는 허위광고에 걸려들어 바가지 쓸 게 뻔하건만 그럼에도 희희낙락 몰려간다.
마치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안 먹어보면 천추의 한이라도 될 듯이.
그럴 만도 한 것이 어수룩한척하는 상술 교묘하고 약싹빠르기 짝이 없긴 하다.
처음엔 흥정도 하며 밀당을 하나 결국은 이래도 안 먹고 안 사겠냐는 비장의 카드를 디미는 가게 쥔.
기어이 지갑을 열도록 만드는 주인장 재주는 거의 심리학 박사급이다.
아무리 그러한들 제 판단, 제 주관, 제 심지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뭔 걱정?
귀가 얇아 고민 없이 무작정 흥분하고 쉽사리 들뜨는 얄팍한 냄비근성, 어디서나 가벼이 휩쓸리는 부화뇌동이 문제다.
한국인의 수준 내지는 민도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한심스럴 정도다.
그러니 나라 정치판이 늘푼수없이 매양 요 모양 요 꼴인가.
한심무인지경인 여야 구케의원 뽑아준 백성들, 저마다 내 탓이오 가슴부터 칠 일이다.
하긴 나부터도 무슨 내용의 드라마길래? 은근슬쩍 호기심이 동한다.
집에 오자마자 검색창에 제목을 넣고 뒤적여보니 40회짜리 드라마가 좌악 열린다.
임상춘 극본의 KBS 2TV 수목 연속극이다.
그렇다면 1 TV도 있나? 티브이를 전혀 안 보기에 양방 시스템이 가동되나 보다 해둔다.
임상춘? 근데 뭐야! 촌스런 남자 이름 같은 작가가 일단 궁금하다.
그 이름은 본명이 아닌 필명, 젊은 여류작가라는 것 외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쫀쫀하고 맛깔스러운 대사를 구사하니 남자라면 의외이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여성작가다.
하루 날 잡아 1회부터 보기 시작해 20회까지 내리닫이로 봤으니 진종일 연속극에 몰빵한 셈.
아무리 잘 된 드라마라도 그 정도라면 메슥메슥 멀짜가 나 질려버릴 만했다.
신물 나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딱 중간에서 접고 말았는데 거기까지 보니 대충 감이 잡힌다.
눈물 찔끔나게 하는 멜로물인 듯싶지만 신파는 아니다.
양념처럼 코믹도 끼어들고 미스터리한 스릴러도 한몫하니 재미지다.
거대담론이 필요치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배경인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서민들의 무대다운 흔한 인물설정에 지지고 볶으며 사랑하고 삐지고 샘내고 뒷담화는 고명.
사람 사는 동네 어디에나 있음직한 보통사람들 얘긴데 웃기는 별종 캐릭터가 둘 있다.
하나는 철이 덜 든 유치한 남자 노규태, 주제파악 못하고 꼴에 차기 군수가 꿈이다.
하긴 개나 소나 나서는 아사리판 정치판인 이 땅에서 대통령 꿈인들 못 꾸랴.
완장차고 싶고 남들에게 특별대접받는 걸 좋아하고 추켜주면 분수 모르고 우쭐댄다.
누구처럼 없는 족보 만들어 돈으로 산 가짜 양반이라 열등감 덩어리다.
동네유지로 존경받고 싶으나 번번 깨지는 수준 미달, 한마디로 결국은 어리석음의 끝판왕이다.
또 하나는 자칭 프리랜서 모델이며 SNS 스타로 웬만한 연예인보다 팔로워 수가 많다는 제시카.
멋지다는 칭찬과 박수받는 인생이고 싶은 치졸스런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남보기에 그럴싸하도록 폼생폼사 기품 쩌는 지적 허영기도 좀 있다.
그런 그녀답게 뭇사람의 눈에 확 띄도록 튀고 싶었고 관심과 주목받는 게 좋았고 그게 사는 이유의 전부다.
따지고 보면 한세상 살다가는 길 오십보백보, 하긴 어떤 인생살이인들 뭐 그리 대단하고 특출나던가.
드라마 주인공뿐인가.
지위고하는 물론이고 배경이나 학벌이며 이력,
표피 거죽이 잘난 들 얼마나 잘났으며 못난 들 얼마나 못났을까.
영국여왕이나 재클린이나 오바마나 힐러리나 한평생 그러구러 살다 간다.
부귀영화 누린다고 천수를 살겠나?
그래봤자 모두 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인간이며 희로애락에 매인 그냥 어미 아비였다가 죽는다.
별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