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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4. 2024

오월의 빛

이박 삼일의 여정을 배낭에 간단히 챙긴 뒤 끄무레한 날씨임에도 아들아이는 산행에 나섰다. 오직 혼자만의 시간을 짊어지고서. 다행히 오후부터 하늘은 개였고 이후 화창한 봄볕이 내내 눈부셨다. 그리고 오늘,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돌아왔다. 근 70여 킬로를 걸었다는 아이는 별로 지친 기색도 아니다. 그을린 얼굴에 차림새야 후줄근해졌으나 오히려 둘레에서 느껴지던 건강한 빛무리.



문득 오월과 가장 격이 잘 어울리는 나이가 스물이구나 싶었다. 이제 젊음을 옥죄였던 대입시의 질곡에서 벗어나 저 무한한 세계로 거침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찬란한 시기, 대학 일 년생. 싱그러운 자연과 교감 나누며 삼림욕으로 샤워하고 돌아온 까닭일까. 큰 산의 정기 마음껏 만끽하고 돌아온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땀 냄새만이 아닌 싱푸른 신록의 향이 배어났다. 눈빛은 더욱 맑아져 있었고 가슴은 드넓은 포용력으로 열려 있었으며 산처럼 한결 듬직해진 모습이 늠름하기조차 하였다.



마슈즈는 분별없고 사려 없는 자에게 등산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믿는다. 그의 분별심과 사려 깊음을 확신하기에 지난겨울 거의 초심자이다시피 한 그의 설원 등반도 만류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혼자였다. 가족과 사회의 일원에서 따로이 떨어져 오직 하나의 주체가 되어 홀로 서 보는 것도 가끔은 필요할 터. 한껏 자유로운 가운데 스스로를 책임지고 관리해 나가는 훈련도 바람직한 일. 혼자의 시간은 또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해 준다. 그로써 사유의 폭을 넓혀 갈 수 있는 것. 자기 응시는 물론 자신의 객관화도 이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리라.



대학에 가면 그는 일요일마다 산행을 가겠다고 별러왔다. 극기와 절제의 시간이 보람으로 열매 맺어 대학생이 되었으나 정작 일요일은 비어 있질 않았다. 봄 내내 이어지는 동문에 서클에 이런저런 모임들. 잠시의 짬도 없이 지치도록 밀려다니느라 오히려 고교 시절이 좋았노라는 행복한 투정마저 나왔다. 그러다가 축제 무렵 시간을 만들어 훨훨 날 듯 그는 산으로 향했다. 홀가분하게 단 혼자서. 일행이 없다 보니 새로운 만남의 계기도 됐고 칠불암에서 하룻밤 유할 수도 있었다 한다. 새벽같이 오른 유평 계곡의 안개는 신비하다 못해 괴괴했지만 벽소령에서는 두릅을 얻기도 했다며 평소 과묵한 그의 입에서 모처럼 많은 얘기가 풀려나왔다. 지리산은 대입 시험 치른 다음 입학식이 있기까지의 공백기에 종횡무진 누빈 산이었다. 사슴처럼 눈밭 헤치며 수차례 산행 가진 터라 지리산을 미련 없이 다녔지 싶은데도 종주를 못해 아쉬워하더니 드디어 기회가 닿았던 것.



일상의 규범과 정해진 틀로부터 놓여 나는 즐거움은 크다. 대자연이 주는 신선한 감동이란 또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가. 이렇듯, 젊은이들에게 넘쳐나는 에너지를 건전하게 분출하는 방법으로 나는 산행을 권해왔다. 예부터 장부는 높은 산에 올라 탁 트인 사방을 조망하여 호연지기를 길렀다. 산의 장엄한 기상과 묵직한 덕과 꿋꿋한 절조를 배워서 겸손하면서도 매사 자중하는 젊은이가 될 수 있을 터. 더불어 자연의 섭리 통해 삶의 질서와 조화의 미를 터득하고 건실한 가치관도 정립할 수 있으리라.



올여름방학. 서울로 진학한  친구와 짜 놓았다는 국토순례 계획은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게 한다. 내 땅 곳곳을 디뎌 보며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해 보거라. 그 모두를 직접 오관 통해 흡수해 들여서 책 밖에 있는 세계와 악수 나누며 인생의 폭을 최대치로 확대시켜 나가거라. 香雪에 방초 헤치면서 능선과 골짜기를 넘나든 저 굳건한 심신이라면 판문점에서 부산까지가 대수랴.

내일은 선배들과 표충사 쪽으로 MT 간다며 다시 배낭을 꾸리는 아이. 싱그러이 빛나는 푸르름이여. 이 오월의 빛은 바로 너의 몫이구나. -19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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