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이라?
모자 그중에서도 과거 남정네들이 쓰던 갓을 테마로 한 전시관은 첨 본다.
돌문화공원 가는 큰 길가에서 우연히 눈에 든 갓 전시관이다.
교래리 지나 조천읍 남조로 1904에 위치, 거의 모든 차량은 씽씽 스치며 곁눈도 안 주고 질주했다.
생소한 것들은 일단 호기심을 자극한다.
반짝 눈뜬 호기심만으론 아니 되고 이에 열정이 가세한다.
물론 널너리 한 시간 여유도 한몫 거든다.
그렇게 들어간 갓 전시관이다.
지상 1층은 전시실, 지하공간에는 전수자의 작업 공방 등이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심지어 안내 접수처도 비어있다.
현관문을 밀자 열리므로 입장했고 웅웅 화면 소리가 나기에 안심하고 불 밝혀진 전시실로 향했다.
전시 공간 역시 관람객은 전무, 나 홀로 독상을 받았다.
직업군 무수하므로 모르는 직업세계도 천지 숱하다.
그렇듯 갓 박물관에 드니 처음 접하는 생소한 단어 투성이다.
갓의 형태가 이리 다양하다는 것 역시도.
전통 갓은 삼국시대부터 유래했으며 5세기 고구려 벽화 기마수렵인물도에서도 나타났다.
고려시대에는 일반 중인들도 모자가 보편화됐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폭넓게 성행하였기에 사극마다 흔히 등장하는 갓이다.
심지어 드라마 속 저승사자도 쓰는 갓이다.
그들도 설마 특화된 명장 작품인 갓을 사용했을는지.
느닷없이 그 생각이 든 이유는 50여 번의 공정과정 거쳐야 탄생하는 까다로운 갓도 모조품이나 가짜가 있을까 싶어서다.
요샌 아마존에서조차 갓이 인기 판매품이라니 K컬춰가 글로벌하게 둥둥 뜬 덕이리라.
섬세하고 정교한 수작품인 갓을 만드는 양태장이 제주에 있다는 것도 여기 와서 비로소 알았다.
갓의 다양한 종류를 비롯해 역사와 구조 변화, 제작 도구와 기술(갓일) 과정 등을 기록물과 사진 및 영상 통해 자세히 소개한 이 전시관.
갓일은 갓을 만드는 기능이다.
양태와 총모자가 만들어지면 이것들을 한데 모아 갓을 만든다.
명주실을 입히고 먹칠과 옻칠을 해 갓끈까지 달면 완성이다.
먹칠 옻칠만이 아니라 하얀 백칠, 붉은 주칠도 용도에 따라 멕인다.
모자의 니라, 조선 코너에서는 QR코드로 들어가면 일일이 각개 모자에 따른 상세한 설명이 따른다.
우리가 보는 갓은 그냥 테 달린 모자만이 아니라 탕건, 총모자, 양태, 양건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갓일은 말의 꼬리털인 말총으로 모자 부분을 엮는 총모자장, 대나무를 가늘게 쪼아 챙을 만드는 양태장, 이 둘을 합쳐 완성하는 입자장이 있는데 이곳은 대를 이어 여성에서 여성으로 바통이 넘겨진 양태장이다.
갓 전시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양태장 기능 보유자 장순자 씨가 부지를 제공해 2009년 건립하였으며 국내 유일의 갓 전문 단독 전시관이다.
타지방에도 갓일 기능보유자가 있지만 대형 박물관에 기증한 케이스 외엔 전시실을 연 경우는 제주뿐이다.
갓을 착용했다는 것은 어른이 된 남자라는 뜻이며, 주로 선비나 양반들이 머리에 쓰던 의관의 하나다.
갓 만드는 일은 머리를 덮는 대우(총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 부분인 양태를 따로 제작하여 합치는 두 파트의 협업이다.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수공예 작업으로, 총모자와 양태를 접합하여 세 번째 파트장인 입자장이 모자 형태를 만든 후에는 칠을 해 마무리하려면 몇 달이 소요됐다.
모자 부분은 말총을 작은 쇠갈고리처럼 생긴 바늘로 정교하게 엮은 뒤 먹칠을 해 총모자를 만든 다음 여기에 차양 부분 양태를 실올처럼 곱게 쪼갠 대나무로 짜 만들었다.
질이 좋은 대나무를 아주 가늘고 길게 다듬어서 양태를 만들어 대우와 붙인 다음 싸기를 하고 옻칠하여 완성시켰다.
양태는 레코드판처럼 생긴 차양 부분으로 대나무를 삶아 쪼개고 문질러 뽑아낸 머리카락 굵기 실로 이은 뒤 다시 명주실 등을 덧입혀 옻칠을 한다.
세죽사(細竹絲)나 말총으로 갓모자를 만드는 일과 가느다란 대 줄기로 양태를 엮는 일, 또 갓방에서 갓모자와 양태를 서로 모아 인두질과 아교칠 통해 갓을 완성하는 이 핵심 공정은 각각 따로 행해졌다고.
이 같은 세 공정을 거친 다음에는 용도에 따라 칠을 하게 된다.
양옆에는 갓끈을 달아서 썼으며 사극영화에서 보면 부유층은 호박이나 수정 같은 장식 끈을 달아 드리웠다.
원래 갓은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일종의 쓰개였으나,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로 정착됐다.
갓은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 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졌다.
형태상으로 볼 때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方笠型)과 구별 뚜렷한 패랭이형(平凉子型)이 있다.
방갓형은 삿갓, 전모 등이 있고 패랭이형은 초립(草笠)·흑립(黑笠)·전립(戰笠) 등이 있다.
외출 시나 의례행사 등에 으레 이처럼 의관을 갖추었는데, 한자 뜻을 살피면 쉽게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갓은 상투 튼 머리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게 돼 있다.
단발령이 내려져 상투를 베어낸 후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시골에서 육이오 이후까지도 계속 착용했다.
하여 내 유년의 기억 속, 외조부께서 시제 지내러 사당에 가실 때면 흰 두루마기 떨쳐 입고 갓을 쓰셨다.
친가인 매방리 할아버지 사랑채에도 걸려있었던 갓을 본 이래 칩십여년 만의 해후다.
모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만한 존재가치나 존재이유가 있는거야?
곰곰 따지고보니 그럴만도 하다.
옛날 관리를 선발하던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 네 가지였다.
이는 신당서(新唐書)에서 취한 말로, 중국 당나라 때부터 관리 등용 시험에서 인재를 평가하던 기준이다.
그중 앞머리에 내세운 身은 바른 몸가짐으로, 조리 있고 겸손한 언변, 반듯하고 깊은 문장력, 사리분별 뛰어난 판단력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외면적인 풍모와 내면의 됨됨이를 모두 갖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곧 전인격적인 자질을 강조하는 의미로 통용되는 신언서판이다.
신언서판이 인재 평가의 핵심 잣대이긴 현대 역시 마찬가지다.
고만고만한 커리어와 스펙 수준에서 선발하므로 인터뷰 시 자세, 곧 태도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실제 면접관의 68%가 태도와 신뢰성을 가장 중요한 합격 요인으로 꼽았다.
카밀 래빙턴은 사람의 첫인상(초두효과)은 3초 안에 각인된다고 했다.
단박 내면을 파악할 수 없지만 단정한 옷차림과 태도가 상대방을 판단하는 데 55% 비중을 차지한다 듯이.
첫눈에 보이는 것이 즉각 시선에 꽂히므로 그만큼 이미지 메이킹이 중요하다는 것일 터다.
한 가지 더, 더군다나 어째서 의식주라 할까?
허술하게 입고는 살아도 안 먹고는 못 사는데 왜 衣가 食보다 먼저일까.
생존을 위한 최우선 조건은 음식인데 왜 '의'가 먼저 나왔을까.
이는 옷이 삶의 기본 요소인 동시에 신분 계급 등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사상가 관중이 쓴 '관자(管子)' 목민(牧民)편에는 '의식족이지영욕(衣食足而知榮辱)',즉 입고 먹는 것이 충족돼야 명예와 수치를 안다고 했다.
기본예절을 가르치는 ‘소학(小學)’ 수신 편에도 容貌端正(용모단정), 衣冠整齊(의관정제)란 구절이 나온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라 하면 이는 정식으로 바르게 옷차림을 갖추란 뜻이다.
의관은 문자 그대로 ‘옷과 갓’을 지칭한다.
언어는 중요도에 따라 말뜻이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외모를 단정하게 차리고 의복을 가지런하게 입는 것이 예절이라고 가르쳤다면?
아마 유교 사상에 따라 예의범절을 지켜야 했기에 ‘의'를 앞에 내세웠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서구의 명문 사립학교는 어려서부터 정장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게 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은 규정상 단정한 차림이 아니면 입장할 수가 없으므로 피에타상을 못 보게 된다.
하다못해 전통 있는 식당 중에는 정장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도 허다하다.
품위와 성정을 드러내는 무언의 언어가 옷차림이므로.
오죽하면 옷이 날개요 옷이 인격이라 했으랴.
속담에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염치와 예의를 아는 인간이라 의관이 동물적 본능인 먹거리보다 앞서는 이유 아닐지.
갓 전시실을 나와 남조로를 걸으며 여러 생각들이 모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