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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30. 2024

그해 유월 스케치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3가에 있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산하의 임시 수도 기념관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토성역 2번 출구로 나왔다.


이십여 년 전에 몇 번 들렀던 곳인데도 날로 복잡해지는 도심 한 모서리라 길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골목길과 층계를 오르내리다가 겨우 기념관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입구가 전과 달라진 까닭이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말 그대로 한국동란 시 부산이 임시수도였을 때 이승만대통령이 이태에 걸쳐 거처하던 관저였다.


전의 인상은 피란 당시 이대통령의 검박한 생활상을 주로 부각했다면, 새로 꾸민 기념관에는 육이오 발발과 전개현황을 사실적으로 다룬 점에서 느낌이 달랐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므로 인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몫 이전 후세 역사가 평가함이 옳겠다.


그 이전 분명히 알고 넘어갈 몇 가지를 짚어본다.


노추로 얼룩진 독재자 이미지만 각인된 이대통령이 선각자다운 혜안으로 신생국의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은 대단한 성취다.


나아가 평화선(국제적으로 통용되기로는 이승만 라인) 선포로 영해 개념을 확립시키고 독도를 지켜냈다는 건 이대통령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시킨 일이야말로 역사가들조차 인정하는 쾌거다.


포로 석방에 반발하는 미국 측에 “전작권을 다시 가져오겠다” 라며 초강수를 둔 일과 그로 인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태동하는 초석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 아닌가.




임시수도기념관 초입.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대통령이 책을 들고 전방을 주시하는 동상이 세워졌더랬다.


2011년 6월 4일, 설치된 지 3개월 만에 대통령의 동상은 철거됐다.


전날 동상이 붉은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편벽된 사고로 현재까지도 진보 보수 나뉘어 갈등의 골 깊이 파여 있듯, 이처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이 거리는 여전히 우리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기만.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말해줄 것임에도 조각상에 페인트를 끼얹는 짓거리를 한 자들은 누구?


이처럼 성급하게 어쭙잖은 제 판단기준에 의한 만용을 부리는 한 광기는 언제쯤이나 누그러들까.


흑백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균형감각이야말로 대한민국에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혹자는 이승만이 친일파 척결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크게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것이 친일파의 기준이 과연 정확하게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일제 36년이라는 거의 반세기 가까운 기간에 친일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그 대상이 많았다.


그 시대에 태어나 살았다는 죄로 뭉뚱거려 몰아붙인다면  친일파 아닌 이 과연 몇일지.


나아가 민족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참작해야 하리라,


따라서 과연 친일파 척결이 지금 우리가 입으로 외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겠는가는 깊이 숙고해 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첨예한 좌우 갈등 국면의  상징처럼 된, 임시수도기념관 입구에 세워졌던 건국대통령 동상은 페인트 투척사건 후 철거되고 대신 <군상>이라는 조각품으로 대체시켰다.

군상이란 제목의 조형물은 육이오 당시 피난시절의 역경을 이겨낸 인간 군상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키가 많이 자랐으나 사방으로 밀밀하게 들어찬 고층 아파트로 인해 기념관과 더불어 더욱 납작해 보였다.

임시수도기념관 건물은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할 때 지은 것으로 1926년에 준공되었다.

1983년 7월까지 경상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던 목조 건물이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1950∼1952년) 대통령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착취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료인 경남도지사의 관사라는 점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사의 질곡과 함께 한 건물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전에는 단출한 벽돌집뿐이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규모가 확장돼 출입구도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변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천 년대 들어 건물 복원 공사를 통해 기존의 임시 수도 대통령 관저와 함께 기념관이 들어섰으니 낯설밖에.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집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경남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며 도지사 관사는 대통령 관저가 됐다.

부산시가 이 유서 깊은 건물을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보수하여 활용하게 되었으며 2002년에 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하였다.

기념관 1층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도착, 외국군의 부산진주, 인천상륙작전, 노천교실 수업 장면 등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 120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집무할 때 사용하였던 야전용 목침대, 책상, 의자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일제강점기 착취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료인 경남도지사의 관사라는 점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한 건물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큰 건물이다.

대통령이 집무실 의자 뒤쪽엔 이승만 대통령이 환도를 그리며 직접 쓴 한문자작시가 6폭 병풍에 담겨있으며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휘호도 걸려있다.

통일을 염원하고 수복 환도를 되새기는 뜻으로 건물입구 정면에 ‘사빈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대통령관저가 된 이 건물의  당호인 사빈당(思邠當)은  주나라 건국사에 나오는 '고공단보의 빈'에서 따온 글귀로 서울 수복 나아가 환도의 의지가 담겨있다.


주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고공단보' 을 덕(德)과 의(義)로써 다스렸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는데, 어느 날 오랑캐가 침략하자,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지 않고 빈을 내주고 기산(岐山) 남쪽의 주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빈의 백성들도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왔으며,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이웃나라 백성들까지 귀의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중국 전체의 패권을 장악해 주나라를 건국했다는 고사.

때마침 뜨락에서 김성환화백의 스케치 다수가 특별전시되고 있었다.

1950년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이 발발했던 바로 그날 김화백의 스케치이다.


1950년 6월 25일 서울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군용 차량들이 마구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계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동족상쟁의 비극 6.25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년여의 전쟁이 끝나고 38선 대신 새롭게 휴전선이 형성되었으며, 이때부터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양측의 적대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만 해도 국군과 유엔군을 포함해 약 18만 명이 전사, 민간인 99만과 경찰관 1만여 명 희생.


국군부상 45만 명에, 포로 8,343명, 유엔군부상 103,460명에, 포로 5,817명에, 북한군 사망은 약 52만 명 추산,


양쪽의 행방불명실종자도 1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전쟁미망인 20만 명, 전쟁고아 10만여 명.

행정안전부 국가 기록원에 남겨진 6.25 피해에 관한 기록문 일부다.

가는 방법:부산 ​지하철 1호선 토성역 2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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