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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3. 2024

항파두리, 항몽 유적 읽기

제주섬에 들어와 일 년 살이를 시작했다.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오로지 걷기뿐이라 한라산을 비롯 오름이며 올레길 걸어 다닐 요량이었다.

서귀포에 거처를 정하고 온데 사방으로 자재로이 쏘다니면서 맘 내키는 대로 제주 곳곳을 섭렵해 나갔다.

일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갈 곳은 천지, 다시 한 해 더 연장한 지도 열 달 넘었으니 또다시 연장하면 삼 년째가 된다.

제주의 자연과 환경은 걷기 좋아하는 체질에 딱!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는 이대로 눌러 살 참이다.

하여 스스로 건강관리 잘해나가며 선물 같은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렇다고 나만 괜찮아서도 될 일이 아니다.

지난겨울 미국 가서 할망 잔소리 같지만 요셉에게도 단디 당부를 해뒀다.

건강식 챙기고 꾸준히 운동해서 모쪼록 제발 아프지 말라고, 노년에 이른 지금 그것만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호혜라고.

만약 병나면 수발을 전적으로 딸내미에게 맡길 수 없으니 축복 가득한 제주살이 청산하고 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항파두리 탐방기를 쓰기 앞서 잡설이 긴 이유, 제주에 닿자마자부터 찾고자 했던 곳인데도 이제야 방문한 데 대한 민망함 때문이다.

본디 역사에 관심 깊은 터라 백 년여 몽고의 지배하에서 살았다는 제주 역사 자체가 수수께끼였다.

어쩌다 오랜 기간 동안 원의 직할지로 말을 풀어놓고 키우는 목마장 노릇에 일본 공략의 전략기지로 이용만 당한 섬이 되었나.

공민왕 때인 1374년 최영장군에 의해 말 돌보던 몽고족이 벌인 목호(牧胡)의 난이 범섬에서 토벌될 때까지 숱한 고초를 겪었던 섬사람들.

당연히 항몽유적지는 순위로 봐서 앞머리였으나 상그러운 교통편 핑계로 여타 명소들만 쫓아다니기 바빴다.

산록서로를 타고 들어온 유적지 저 너머 울멍줄멍 둘러서 있는 오름  이마 위 하늘은  구름 가득했다.


배롱나무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사적 제498호인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초입.


 순의문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抗蒙殉義碑가 자석처럼 발길 이끌었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제자(題字) 비문 앞 향로에서는 한줄기 향연이 피어올랐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가 왜 제주에?


13세기 세계 제패를 꿈꿀 만큼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거의 정복한 강대국 원나라라는 몽고족과 삼별초군과의 마지막 항쟁터가 여기였다.

이는 천여 년도 더 전인 1273년도의 일이다.

요즘에야 해외 노동자 되어 한국으로 기를 쓰고 몰려들 오는 몽고인이자 과거 변발족 몽고인데 정말로 인생사나 세상사 새옹지마다.

고려 고종 인 1231년부터 몽고잦은 침략으로 왕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왕이 작은 섬으로 피해야 할 정도로 수차례 궁지에 몰린 딱한 고려.


수모를 참다못해 무인 가운데 배종손 장군이  몽고를 상대로 결사항전에 나섰다.

그가 앞장서 1270년 군사를 규합해 삼별초군을 짜서 대몽 항전을 결의하였다.

세계 최강 군대를 맞서기엔 역부족인 전력, 삼별초군은 그러나 해전에 약한 몽고의 허를 노렸다.


기마병인 몽고 군사 유인책의 일환으로
배를 타고 진도로 가서 용장성을 근거로 항전했으나 한 해만에 대패했다.

이때 배중손 장군은 전사하고 김통정 장군이 잔여 부대를 진두지휘, 탐라로 내려왔다.

육지에서 들어오는 뱃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애월 산지에다 그는 결사항전의 터를 닦았다.

그렇게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대몽항전을 계속하던 중 1273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이태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김통정 장군은 붉은오름에서 자결하고 삼별초군은 거의가 순의(殉義), 남은 얼마간의 군사들은 오키나와로 떠났다는데....





어쩌다 보니 하필이면 유난히 후덥지근더위항파두리와 비로소 시절인연이 닿아 찾게 됐다.

택시에서 내리자 여전히 무더위 기세등등했으나 한라산 아래 푸르게 솟아있는 뭇 오름 전망이 눈 맛 시원하게 해 줬다.

드넓은 광장은 연초록 잔디 정성스레 다듬어져 있었으며 둘러싼 왕벚나무 그늘 어둑신했다.

삼별초군의 푸른 결기와 붉은 단심이듯 순의문 앞에는 퐁낭 노거수 짙푸르고  배롱나무꽃 게 피었다.

자주 호국의 결연한 민족 의지가 혼불처럼 타오르며 새겨놓은 역사의 주요 페이지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순의문을 지나 삼별초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항몽순의비 참배하고 경내 잠시 둘러보는 사이.

등에서 주르르 땀이 흘렀다.

이 터에서 산화한 삼별초군, 항파두리 마지막 항전터에 마련된 전시관으로 일단 서둘러 들어갔다.

사실 너무도 더워서 냉방시설이 돼있는 공간으로의 도피 즉 피서 목적이 앞서서였다.





뾰족한 돌조각이나 깨어진 토기 쪽에 기대는 고고학 발굴에 거의 가까운 항몽 격전지가 아닐까 싶었던 대로였다.

땅속 파헤쳐 본들 유구 터에서 토성 규모 파악이나 간신히 될 듯, 아주 먼 고려 시대 유적지 그것도 급히 조성된 요새 자리다.

토성 사대문에 문을 달며 사용했던 돌쩌귀가 이끼 낀 퐁낭 앞 노지에 진열돼 있던 걸로 미루어 석물이나 그 세월 견뎌냈을까.

출토 유물이 별로 없으리라던 예측 대로였다.

전시품은  암막새 수막새 같은 기와 편과 바스러지다시피 잘게 조각난 막그릇 부스러기 외에 목조 구시통(물통) 일부분이 전부였다.

무너져 내린 성터 발굴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삼별초군이 어떤 방식으로 적에 대비하였나를 보여주는 실물을 벽 전면에 만들어놨다.

토성의 평면도와 횡종단면도가 그나마 여기 이르러 실제감을 갖고 다가왔다.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그림도 현장감을 덧보태줬다.

삼별초의 대몽 항전 결의도, 항파두리 축성도, 여몽연합군의 함덕포 상륙도, 최후의 혈전도 등 기록화 몇 점도 양 벽면에 걸려있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영상 미디어물이 혼자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항파두리에 관한 영상물에 집중했다.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덕에 어느 정예 해설사보다 적확한 역사 해설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인과관계 나아가 후대에 전하는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피서하며 접하게 됐다.


영상물 목차는 고려와 몽골의 전쟁, 삼별초의 또 다른 전쟁, 몽골의 제주 지배 백 년, 과제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부터는 곳곳에 지루하게 연대기가 따르므로 오래전 역사에 흥미 적다면 그대로 패스. 그러나  삼별초 항전사를 비롯 1세기 동안 제주를 지배한 몽고, 나아가 제주와 말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자 한다면 .....)

이에 앞서 13~14세기 고려와 중국 그리고 제주의 연대표에 주목하게 됐다.

고려 위쪽에 있는 몽골 대륙에서 전설적인 인물 칭기즈칸이 1204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어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 몽골국을 건설한 무패신화의 쿠빌라이 칸 시대가 펼쳐졌다.

전 세계를 제패할 듯 세력을 뻗어나가던 그들은 1231년부터 일곱 차례나 이웃나라 고려를 침공해 왔다.

1271년 세계 최강대국인 된 몽골은 원나라를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남송을 정벌하고 일본에 두 차례나 군대를 보냈으나 거친 태풍이라는 신풍, 기적 같은 가미카제 덕에 용케도 일본은 정복당하지 않았다.

현재 코리아로 불리게  된 근원인 고려국은 1206년에 건국하였다.

그 후 중국 대륙 제국들로부터의 침공은 견뎌냈으나 몽골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다 못해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왕도를 옮겨야 했다.

몽골의 강압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약체 민족이 겪어야 하는 수난사 그 자체였다.

고려 원종 11년, 조정이 몽고군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하자 이에 끝까지 항몽 결의를 다진 이들이 있었으니.

강화에서 봉기한 무장세력인 삼별초군은 국난극복을 위하여 끝까지 자주적으로 결사항전할 것을 다짐했다.

그들은 고려군의 정예 별동 부대로서 고려 원종 11년 고려 조정이 몽골군과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반몽 항쟁을 선언하였다.

무신 집권자인 최우가 야간 치안유지를 명분 삼아 야별초를 조직한 것은 1230년의 일.

별초란 가려 뽑은 부대를 뜻하는데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 확대시켜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가 그 정권을 붕괴시킨 주체였다가 대몽항쟁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진도로 내려와 용장성에서 항몽 의지를 더욱 굳혀나갔으나 이듬해 여몽연합군에 의해 성을 함락당한다.

이때 삼별초군의 중심이었던 배중손 장군도 전사했으며 김통정 장군이 잔여 부대를 이끌고 제주에 입도,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주 북서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조망권 최대한 확보되는 위치이자  지리적으로 천연 요새 장소에다 외성과 내성을 이중으로 설치했다.

그들이 제주도에 쌓았던 내·외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고토성 고장성 항파두리고성 애월목성 등이었다.

고장성은 오늘날 환해장성으로 불리는 석성으로, 원래는 1270년 조정에서 김수를 비롯한 관군을 풀어 삼별초의 제주 입도를 막고자 쌓았다.

별도포에 설치된 고장성을 이용,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의 진입을 막기 위한 석성 시설을 대폭 확장시켰다.

이 석성은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120여㎞나 됐다고.

항파두리 고성 규모는 둘레 700m 정도이며 장방형의 석성이 내성이고 성읍 전체를 두른 외성은 토성으로 길이가 6㎞에 달했다.

토성 위에는 재를 뿌려놓고 적이 나타나면 말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도록 하여 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연막전술까지 폈다.

이처럼 철두철미 방비를 했으나 한꺼번에 1만 2천여 명의 대군이 병선 160척을 이끌고 추자도를 경유해 함덕포로 밀려 들어왔다.

결국 중과부적, 1273년 여몽연합군의 총공세에 제주성은 무너지고 삼별초군은 거의가 순절했다.

이후 몽고군은 바닷길의 요충지인 제주의 입지조건에 해 1275년 탐라통관부를 설치한 뒤 실질적인 제주 통치에 들어갔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통정 장군 등 70여 명은 한라산으로 탈출, 3년간의 항몽 활동이 무위로 끝나자 장군은 붉은오름에서 자결한다.

몽골은 고려와의 연고권을 끊기 위해 제주를 탐라로 호칭하기 시작했다.(그렇다면 탐라라 부르기가 영 꺼림칙.)

또한 제주에 '탐라국 초토사'를 설치한 다음 육지와는 달리 관부를 두고 관인을 파견해 직접 지배에 나섰다.

몽골 지배하의 백 년, 처음 시작은 몽골말 160마리를 싣고 와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서 방목을 하였다.


 말이 달아날 수 없는 외딴섬의 특성을 십분 활용, 차츰 제주 전역을 마목장으로 삼았다.





한편 일본 정벌을 위해 병선을 건조하였으며 섬에서 나오는 물자를 본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역참을 전라도 각처에 설치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 사망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 균열과 라마승의 발호 및 자연재해 등으로 제국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와중에도 몽고 황제 순제는 마지막 의탁처로 제주 서남부 지역 엉또폭포 인근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흔적이 남아있기도.  


제주인의 정기를 말리려고 찬 식품인 메밀을 몽고인들이 보급시켰다는 설도 있으며 제주 전통음식으로 자리매김된 고소리술이나 상애떡 빙떡은 몽골 음식에서 유래됐다고.


하긴 1세기라는 세월이 얼마나 기나긴가.





마침내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의해 원나라는 몽골고원으로 밀려났다.

고려는 1370년 명과 수교를 맺게 되고 국교 수립과 동시에 제주마로 인해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1374년 명나라에서 제주마 2천 필을 요구하자 원나라 말을 적에게 보낼 수 없다는 목호의 반발로 겨우 삼백 필만 상납했다.

그즈음 공민왕은 제주말을 빌미로 명나라가 침입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는데.

같은 시기, 몽골이 목마 관리를 위해 보낸 목호 세력은 난을 일으켰다가 고려의 최영장군에 의해 범섬에서 소탕되었다.

그로써 백년에 걸친 제주에 대한 몽골 지배는 종식됐다.

얼마 후인 1392년 조선시대가 도래했다.

이 역시 새옹지마 고사처럼 몽골의 영향으로 우마 사육이 정착된 제주는 최대 국립목장지가 되어 헌마공신까지 나왔다.

여기까지가 전시관 영상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아무튼 삼별초의 대몽항쟁사는 국토와 백성을 유린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일어난 병졸들의 대 궐기였다.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한 국가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내세워 세계 최강 몽골을 상대로 3년간 항전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삼별초의 독자적인 항몽 투쟁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호국 충정의 발로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토성을 따라 걸으며 항파두리 유적을 찾아보았으나 장수물이고 구시물이고 도무지 만날 수 없었다.

안내 센터에 재차 문의도 했으나 이정표가 없어 찾기 어려울 거라던 답변대로 실컷 헤매다 허탕치고 되돌아왔다.

하물며 '살 맞은 돌'이라는 입석이야 1킬로 정도를 가야 볼 수 있다니 이 날씨에 더위 먹을 일이야 할 리 없고.

극락사 경내에 있다는 옹성물은 차밭골까지 갔다가도 길이 험해 더는 내려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참을성 있게 전시관 영상물을 보는 이도 드문 판에 김통정 장군이 관군에게 쫓기다 뛰어내린 바위에서 솟은 샘물조차  어려운 판이니...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항파두리이나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도 볼거리와 만나기 이리 상그러운 데다 안내도조차 빈약하니 대체 무엇에 중점 두고 시설을 운영하는지 .

해서, 드넓은 꽃밭 계절별로 조성해 사진 찍는 명소로 더 알려지게 되고 말았나 보다.

실제 이 정도 대규모로 어마어마한 유적지를 만들어 놨으나 실속이라곤 별로 없는 산책로 구실이나 할까.

세금 들입다 쏟아부은 요량하고는 명분 없기가 걷기 공원 수준이라 하는 말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겨우 꽃놀이나 하자고 예까지 왔나, 하는 아쉬움마저 일게 하다니.


이래서 관계 공무원들 탁상공론에 전시 행정이란 지탄을 받는 것 아닌지.

그 기분 상쇄하려 좀 전 전시관 영상이 던진 오래된 질문을 곱씹어봤다.

1429년 해상문화를 꽃피웠다는 류쿠 왕국이 바다 건너 오키나와에서 건국되었다고 한다.

고려 유민들이 도래해 세운 왕국이라는 설이 제기된 데는 까닭이 있다.

1982년 우라소에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에는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란 글귀가 박혀있었다.

계유년이라면 1273년 제주 항파두리에서 삼별초군이 최후를 맞은 그 즈음이다.

어디에서 흘러왔건 어느 한 곳에 정착지를 삼으면 누구라도 어떻든 먼저 거처할 집부터 세운다.

그가 기와 굽는 장인이었다면 흙을 개어 기와를 빚어 문양 새긴 다음 자신의 사인 넣은 다음 가마에 구웠으리라.

우연의 일치일까? 기와 무늬는 진도 용장산성 기와문양과 흡사히 닮았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유물이 가끔은 이처럼 말을 건넨다.

역사란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였다.

우라소에 성터에서 발굴된 와당을 만든 이는 고려적 어떤 유민일까.

패퇴한 삼별초군이 목선에 의지해 남으로 남으로 노 저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생겨날 법도 하다.

나라 잃은 유민들이 봇짐 지고 북간도로 떠나듯 현대에도 더러 망명객 되어 제 나라를 미련 없이 떠나듯이.




 
토성 뒤로 하고 숲길 걷는데 건공중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기를 쓰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소리쟁이 마른 대궁 긴 가지를 꺾어 거미줄 치우고 잠자리를 구해냈다.

거미줄에 뒤엉킨 은빛 나래는 마구 퍼득대느라 찢긴 채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칡잎 위에 올려놨는데 기진맥진한 듯 잠자리는 얼른 달아날 생각도 못 했다.

모든 생명은 애틋하다.

포획망에 걸렸으니 그대로 두면 거미의 한 끼 식사감이 될 터다.

거미는 한 끼 굶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미안하지만 덫을 놓는 일은 죽음을 부르는 일이라 마뜩지 않아 잠자리에게 자유를 허해줬다.

조물주의 섭리에  반할지라도 항파두리의 비극을 되씹으며 걷던 중이라 생사에 어쩔 수 없이 개입했노라고 중얼거린다.

토성 주변 여기저기, 침략군에 항거하다 스러져간 그 옛날 삼별초의 넋인 양 망초 하얀 꽃들이 나붓거려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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