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빚어낸 도시. 빼어난 천혜의 풍광에다 태평양 넘실대는 저 해양으로 무한정 뻗는 힘의 조화. 그렇듯 부산은 탁 트여 맺힌 데 없고 구김새 없어 좋다. 하여 십 년 남짓 머무는 동안 거기 뿌리내려 결코 회한 없으리란 확신이 설만큼 참으로 살만한 멋진 도시이다. 멀리 떠나온 고향이야 매양 그리움으로 묻어두어 좋은 곳. 대신 저 紺碧의 바다와 숲 우거진 산 더불어 맑은 심혼 가꾸며 오래오래 여기 살고 싶다.
맘 내키는 대로 발길 옮겨도 그 어디나 아름답지 않은 곳 있으랴.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비경 간직하고 언제나 품 열어 기다리는데. 다만 일상 가까이 접할 수 있다 보니 참가치를 소홀히 흘려버리고 또 진면목에 눈 어두웠을 뿐. 버스 토큰 하나로 가벼이 금정산이며 해운대를 안을 수 있는 이 행운이 기적 같이만 여겨지며 나는 번번 감격에 겨워한다. 도시의 옆에서 또는 발치에서 수시로 만나게 되는 바다. 시선 들면 옹위하듯 둘러선 높푸른 산들.
때때로 생활 벗고 태종대에 서보라. 오륙도를 둘러보라. 금정산 범어사에 올라보라. 달맞이길, 을숙도, 청사포인들 저마다의 독특한 맵씨로 올연히 빛나지 않던가. 그 모두가 공들여 가꾼 바 없어도 자연이 저절로 이루어 낸 불멸의 명작, 눈부신 예술의 총화가 아니랴. 동백섬에서 마주한 해운대 일출의 장려함. 금정산 자락의 등꽃 운해와 은사 나부끼는 갈대 능선. 태종대 해벽에 부서지는 파도. 낙동강에 지는 낙조, 겨울 을숙도의 索然함까지 경탄의 찬사에 누군들 인색하랴. 늘 깨어 숨 쉬는 남항의 활기가 있는 부산에 살고 있음에 진정 도도한 자긍심을 지녀도 좋으리니. 여기 이렇게 깃칠 수 있음에 그저 감사로 충만함이 마땅하리니.
오랜 날 먼먼 해양 돌아 부산에 들면 맨 먼저 알은체 눈인사하는 섬이 오륙도라던가. 파도와 해풍에 지질리도록 뒤채여 온 뱃사람들의 지친 심신에 흙내음 풀빛 일깨워 환호하게 하는 섬 오륙도. 누리 만년 넘실대는 물결에 닳고 닳아 반도와 이어졌던 지맥 그 선 끊겨 점으로 남았던가. 바다 가운데 다섯으로 혹은 여섯으로 다정스레 서 있는 섬. 절묘한 솜씨가 빚어낸 기암괴석도, 다소곳 연꽃으로 피어난 고운 섬도 아닌 그냥 예사 섬이지만 단연 부산을 상징할 수 있는 섬. 오늘은 그 오륙도를 가까이 보리라 하고 봄 호수같이 평온한 미포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물빛은 그대로 비취옥이었고 물결은 잔잔했다. 바닷물이 푸른 것은 하늘빛의 반사 때문인가. 청명한 날 바다는 더없이 맑고 푸르르다. 그러나 깊은 바다에 들수록 두려울 정도로 물빛 검푸렀고 물굽이는 점차 드높아졌다. 하얗게 튀어 오르는 물보라. 어지러이 휘감기는 해풍. 휘청거리고 어릿대는 뱃멀미 속에 빠르게 멀어지는 육지 그리고 작아지는 도시.
망망대해 저 끝에 걸린 수평선은 고지식할 만큼 경직된 자세 풀 줄 모르고 갈매기만 훨훨 자유롭다. 그렇게 날고자, 애증의 질곡과 생활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고자 찾아온 바다가 아니던가. 가슴을 연다.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킨다. 녹슨 빗장 제껴 일제히 창문이란 창문 모두 열고 찌든 오탁 말끔히 비워 낸 이 청량감.
문득 鮮綠의 산협이 다가서는가 했는데 아른거리기만 하던 오륙도가 목전에 잡힐 듯하다. 섬을 휘어 안고 시퍼러이 너울대는 파도. 바다 가운데 못 박혀 한껏 분망한 파도의 부대낌에 숙명처럼 수난 겪는 섬. 그 섬 오륙도는 이웃에 형제만 거느린 게 아니라 등대며 동굴, 소나무도 품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종 거부하는 손짓으로 완강히 밀어내는 파도.
감청의 맑디맑은 바다에 표연히 깃발로 선 오륙도. 그 섬을 연모하는 파도의 외곬 사랑은 처절하기조차 하다. 속삭이다 집적이다 차마 못 견뎌 마구 포효하며 솟구쳐봐도 까딱없는 섬. 어느 땐 순정으로 젖어들다가 때로는 주체 못 할 격정으로 제 자신을 갈가리 찢는 파도, 해서 파도는 사디스트였다가 마조히스트가 되는가. 부질없는 상사로 몸살 앓는 파도에 한사코 정절 지켜 완고한 섬. 자나 새나 성가시게 보채는 파도의 성화에도 전혀 굴함 없는 섬은 줏대 굳건한 장부이며 절조 높은 여인이다. 뜨거운 연정으로 여위다 끝내는 함께 죽어지라 부딪치고 또 부딪쳐 장렬히 산화하는 파도의 흰 넋.
순간. 언감생심 지존하신 선덕여왕님 간절토록 사모하다 불덩이로 미쳐버린 서라벌의 지귀가 떠오른다. 사무치고 또 사무친 그의 純愛. 일심으로 바친 지극한 애모의 念. 그 순연함이 차라리 비장하지 않던가. 해서 구천을 떠돌던 혼 되돌려 이승에선 가슴 식힐 바다 되었으리. 시린 빛 풀어 안고 파도로 화했으리. 펄펄 휘날린 화염 대신 白沫 날리며 섬으로 향하는 격렬한 몸짓이 되었으리.
파도는 그렇게 오륙도를 조각하고 있었다. 이리 깎고 저리 다듬으며 끌 쥔 손 옹이 박히도록 지성스레 그를 만드는 파도의 일념. 오늘도 여전히 해조음 무늬 놓으며 천파만파로 파도는 출렁댄다. 바다에 온전히 전부를 내맡긴 듯하면서도 사뭇 도사린 몸 열지 않는 섬. 살점 깎일망정 굳게 지켜 온 순결이기에 섬은 정려문으로 서게 된 걸까.
당초도 그랬고 영원토록 섬의 연인은 바다가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천상에 이르고자 마냥 높이 솟던 열망 갈앉힐 수 없어 끝내 목마른 흠모로 발돋움해 보는 하늘에의 사랑. 그 하늘에 뜬 별과 달, 해와 구름을 바라고 사는 섬이었던가. 굽이치며 나부끼며 내닫는 파도. 종내는 섬에 부딪혀 거품 물고 무너지는 비련. 덧없이 스러지는 물안개로 마감하는 허무. 비록 비련의 허무일망정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는 건 가슴 설레는 기쁨임을 파도는 진작 알았나 보다.
지침 없이 오고 또 오는 비장하도록 아름다운 저 파도로 하여 오륙도가 존재한다는 逆의 묘리에 돌아오는 뱃길은 더욱 기웃댈 수밖에 없었다.-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