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뮤지션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 두다멜이다. 몇 해 전 추억 하나를 소환해본다. 해가 이울어가는 시각. 헐리웃 볼 공연장에 도착했다. 하이랜드 애비뉴 산자락에 자리 잡은 헐리웃 볼.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자연 속의 원형 극장으로 여름 시즌 동안 화요일과 목요일 밤 클래식 콘서트가 열린다. 1922년 건립되었으며 아치형 층층에 수용인원 1만 8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야외음악당이자 클래식 전당이다.
황혼 녘, 콘서트장 주변을 둘러싼 산기슭에는 저녁식사 장소인 피크닉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다. 분위기 즐기며 와인 곁들인 식사를 마친 다음 어스름 깊어가는 여덟시, 별빛 아래 바야흐로 음악회는 펼쳐질 터다. 금일 레퍼토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리고 네 사람의 독창자와 대합창단이 선보이는 Beethoven's symphony No 9 in D minor, Op.125이다. 나의 서프라이즈 파티도 초호화판으로 익어가겠다.
오케스트라 단원과 지휘자가 무대에 올라 자리를 잡자 가장 먼저 미국 國歌를 연주한다. 큰 북이 둥둥둥 장중하게 울리는 순간, 숙연하고도 뭉클해진다. 객석의 청중 모두가 기립해 가슴에 손을 얹고 국가를 제창한다. 國歌는 인종 구분 없이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모든 이를 경건하게 만든다. 풍선처럼 두둥실 뜬 마음결 차분히 다듬어진다. 이어서 <링컨 초상화>가 연주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베토벤 심포니 9번 <합창>중 환희의 송가가 들어있는 4악장이 잠시 후 연주됐다. 우주의 시작을 연상케 하는 힘찬 화음으로 열리는 교향곡, 음반이 아닌 직접 오케스트라 연주로 듣는 교향곡 9번에 객석은 완전 압도당하고 만다. 감정이 한층 고조되며 환희심으로 벅차오른다. 나뿐 아니다. 그렇다. 모두가 기쁨으로 충만히 차오르는 행복감.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라 하였던가.
심포니 9번 <합창>은 베토벤 음악의 최정점을 찍으며. 고금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불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독일 시인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읽고 젊은 베토벤은 음악으로 옮기려 마음먹는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완성시킨 것은 삼십여 년 뒤다. 교향곡에 성악을 집어넣는다는 시도 자체가 획기적이고도 모험적 발상. 그는 형식, 기법 등을 혁신한 새로운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초연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이 곡에 담긴 인류애의 정신과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최고의 음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곡 연주 시간이 한 시간을 넘는 사상 초유의 대작 교향곡 심포니 9번 합창은 그렇게 세상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일생의 꿈이 실현되는 성취의 순간을 눈으로 보기만 할 뿐 자신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대작이 탄생될 즈음 이미 베토벤은 청각을 완전 상실하였다. 음악인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고뇌와 가난의 고통을 초인적으로 극복, 열락의 경지에 도달한 베토벤. 그처럼 마지막 부분, 전 관현악 악기는 합창과 함께 하나 되어 무한한 환희 속에서 화려하게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다.
열정적인 지휘자, 파트마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각 연주자들, 독창자와 합창단들에 보내는 환호소리. 열광의 도가니란 말이 실감 났다. 별빛 맑은 야심한 시각, 몰입도 최고의 연주회는 심벌즈 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꽉 찬 객석에서는 오래도록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차를 타러 언덕길을 내려오느라 물결 이룬 사람들 입에서 환희의 송가가 흘러나왔다. 과연 베토벤은 악성(樂聖)이란 칭호가 합당하고 또 합당한 위대한 음악가였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군.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라네"
영화 The Bucket List 대사 중에서-
기쁨에 취한 여기서 곁길로 빠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잠깐, LA 필하모닉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 약간만 곁들인다. 두다멜은 베네수엘라 출신 지휘자로 2009년 9월 시즌부터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국민 연평균 소득이 4천 불도 못 되는 베네수엘라다. 한때 라틴 아메리카 최고 부자 나라였으나 대통령 차베스의 포퓰리즘은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켜 최빈국으로 만들었다. 석유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는 나락으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되었고 경제성장률은 몇 해째 마이너스로 주저앉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좌파가 집권한 지난 10년간 1백여만 명의 베네수엘라인들이 이민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니 갈등으로 배배 꼬인 어느 나라가 절로 오버랩된다.
베네수엘라 도심 거리는 지금도 시위 인파로 난리 북새통이며 음식과 약품은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만성적인 전력 부족에 생필품을 사려면 몇 시간 줄을 선다는 나라. 그럼에도 1970년대부터 해마다 특별 예산을 들여서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을 시켜왔다. 이태석 신부가 내전으로 피폐해진 수단에 가서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들려주었듯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이 음악교육 프로그램이 엘 시스테마(El sistema)라는 교육 시스템이다. 엘 시스테마는 아이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빌려준다. 레슨도 무료다. 개천에서 용 나는 기적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차세대 지휘자로 각광받는 두다멜은 바로 이 시스템이 탄생시킨 스타다. "정치는 양심과 헌법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그는 오늘의 병든 조국을 향해 쓴소리를 뱉었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