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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Oct 21. 2024

작가가 되고 싶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자의식이 높았다. 낯선 전학생이 오면 라이벌이 왔나 남몰래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양주로 이사를 온 뒤 고학년이 되면서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 낯선 언어를 두고 어려움을 겪었다. 이해하고 싶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영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나머지 학습을 했고, 그것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친구 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위치가 약자에 속했다. 대부분 가난하거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초등학생까지는 그런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재산을 두고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서열을 매겼다. 형편이 안 좋은 일부 애들은 힘으로 다른 애들을 누르려 했고,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그런 애들과 어울리면서 강자에 속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폭력을 저지르거나 거기에 가담하는 애들을 증오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나약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영화 속 히어로처럼 갑자기 힘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선생님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애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 장난처럼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을 볼 때 마음이 괴로웠고, 한편으로 나에게 저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 무리 중 일부가 시비를 걸었고, 나는 그 무리에서 싫어했던 애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그 애의 반격으로 인해 눈 주변에 상처가 나서 꿰맸다. 그 후로 나를 건드리는 애는 없었다.


그 외에는 백일몽 같은 시간에 빠져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도서관에는 많은 책이 있었고, 그중에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과학·교양 서적이나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다. 그런 세상에 혼곤히 빠져 있으면 책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게임을 책만큼 좋아했다. 그렇지만 컴퓨터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모에게 얻은 사양이 낮은 컴퓨터로 컴퓨터에 내장된 게임이나 겨우 얻은 게임CD로 게임을 했을 뿐이다. 지역이 후미져 인터넷이 보급된 것은 중학생 이후였다. 그러다 보니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동네 면사무소(현재의 행정복지센터)에 있는 컴퓨터실에서 게임을 하고는 했다. 그곳은 컴퓨터가 없는 시민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공무원들은 우리가 게임을 하는지 감시하며, 적발하면 쫓아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할만한 게 없을 때 게임은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에는 모험이 있었고, 어떤 선택을 하든지 사용자를 존중해 줬다. 그리고 게임 속 세계에서 맺는 인연이 좋았다. 고3이 되었을 때 형이 대학을 가서 컴퓨터가 온전히 내 소유가 되었다. 그때부터 컴퓨터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게임을 즐겼다.


글쓰기에 관심이 생긴 것은 순전히 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교내 백일장에서조차 상을 받은 경우가 드물었다. 고등학생 때 한 번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심사를 했던 담임선생님이 내 꿈이 작가라는 것을 알고 용기를 주기 위해 뽑은 것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글쓰기를 좋아하니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서로의 글을 합평하면서 놀았다. 요즘에는 웹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가 그때도 유행이었고, 나 역시 웹소설을 썼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글로 먹고살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치기일 수도 있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일 말고는 다른 것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수도권 중에도 낙후된 곳에 살아서 집과 학교 주변에 할 것이 마땅히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았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좋아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딱히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데 굳이 학업에 매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게임을 하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부정했지만 나는 지나치게 게임에 빠져 있었고, 그게 아니면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들을 만한 수업만 열심히 듣고, 시험 하루 이틀 전에 교과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시험을 봤다. 그럼에도 점수는 나쁘지 않았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교는 아니었기에 문제 난이도가 쉬웠는데, 그나마 나온 성적을 똑똑하다는 증거로 삼았다. 그렇기에 모의고사를 보면 공부하지 않은 그대로 성적이 나왔다.


대학에 다 떨어지고 이사 갈 집에서 가장 가까운 2년제 대학만 붙었다. 그때 비로소 성인으로 넘어가는 인생의 시기에서 처음으로 실패했다고 느꼈다. 오히려 주변은 무관심했다. 부모님도 진학 문제에 있어서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는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래도 원하는 전공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이었다. 그런 희망도 얼마 가지 않아 꺾였다. 대학에 들어온 동기들은 성적에 맞춰서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스토리텔링을 학과의 주력 교과로 내세웠다. 그렇기에 커리큘럼에서도 하고 싶었던 문학과는 무관한 강의가 많았다. 교수들은 그저 권위를 내세우며,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학생 중에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과 같이 모여 활동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교수의 눈에 들어오기도 해서 어쩌다 반대표를 맡기도 했다. 짧은 대학 캠퍼스 생활을 즐기려는 동갑내기 친구들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복학했거나 늦깎이로 입학한 형들과 이따금 어울렸다. 그게 아니면 집에 와서 혼자 게임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학 친구들과 친하지 않았으므로 졸업 후에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래서 별다른 연락 없이 군대에 갔다. 그들에게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SNS를 할 수도 있었지만,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군 생활은 지루하고, 괴로웠지만 어찌어찌 흘러갔다. 전역을 마친 나는 전문학사 하나만을 남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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