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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Oct 21. 2024

공장 기숙사 생활

전역 후에도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책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집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십여 분을 내려가야 버스정류장과 편의점이 있었고, 인근 번화가로 나가려면 정류장에서 2~30분은 나가야 했다. 그래서 방에 있는 것을 택했다. 부모님은 전역 기념으로 컴퓨터 매장에서 저렴한 컴퓨터를 사주었다. 공장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책상 옆에 모니터를 놓고 실컷 게임을 했다. 방은 넓지 않아 행거와 서랍장, 책상을 두면 두 사람이 겨우 누워서 잘 수 있는 자리가 남았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근처에 기찻길이 있어 가끔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놀러 온 친구는 그게 낭만적이라며 칭찬했다. 겨울에는 전기판넬로 된 난방 장치가 있어서 온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여름이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고, 선풍기로 버텼다. 너무 덥다 보니 컴퓨터에 몰입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땀을 줄줄 흘리며 무기력하게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반강제로 사촌 형에게 끌려가 공장에서 일을 했다. 갑자기 진행된 일이었기에 영문도 모른 채 따랐다. 공장은 주로 플라스틱 반찬통을 만드는 사출 공장이었지만, 돈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만들었다. 하는 일은 기계에서 생산된 제품이 나오면 정리하는 일이었다. 단순한 업무이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사수랍시고 붙은 외국인 누나가 있었지만 소통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일도 바빠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공장은 여러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가끔 업무가 바뀌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일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지금이라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 텐데, 그때는 그 정도의 일머리가 없었다. 한편으로 적응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여기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고, 억지로 일을 하는 게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어쨌든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고, 그 돈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좋았다. 이렇게 지내면서 돈을 모으다가 나중에 일을 관두고 남은 시간에 글을 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도 얼마 가지 않아 달라졌다. 회사의 팀장도 친척 형의 사돈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 팀장 둘 다 비슷한 입장이었지만 불편한 관계였고, 아버지는 팀장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 처리할 물량이 많아 야간 근무를 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팀장은 나를 야간 근무로 넣고 통보했다. 그 소식을 나중에 안 아버지가 팀장에게 따졌다. 공장 직원의 대부분은 외국인 노동자였다. 아버지는 지위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자신의 가족이 우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야간 근무로 뺀 것에 화난 것이다.


막상 야간 근무로 맡은 일은 당장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그것을 두고 팀장이 자신에게 물 먹이기 위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따지자, 팀장은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나는 직원이 누구든 관계 없이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이도 어렸기에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제 와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팀장이 나를 곤경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일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무신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한 갈등으로 일을 관두기로 했다. 처음 시작한 일이었지만 취직도, 퇴직도 내 의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로 다시 방 안에서 컴퓨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부모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공장에서 일하던 경리가 국비지원 사업이 있으니 그걸로 일을 배워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장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 말이 떠올라서 내일배움카드를 알아봤다. 인근 지역에서 가르치는 직종은 대부분 관심 없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배우기 위해 편집디자인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찾았다.


그때는 단순히 책을 좋아해서 편집디자인을 배우고 싶었다. 편집디자인이 무슨 일인 줄도 정확히 몰랐다. 편집디자인은 책뿐만이 아니라 카탈로그나 브로슈어 같은 편집물을 다룬다. 그렇지만 직업에 무지했던 나는 막연히 편집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편집자와 편집디자이너의 일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도 모르고 편집디자인을 가르치는 곳을 찾아 교육을 신청했다. 가장 빠른 기간에 할 수 있는 곳이 강서구에 있는 디자인 학원이었다.


집에서 편도로 두 시간을 가면 학원에 갈 수 있었다. 멀어도 굳이 그곳을 선택한 것은 내 체력을 믿었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듣고 대단하다며 놀라고는 했다. 수강생 중에는 먼 지역에서 온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서울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학원에서는 6개월간 매일 강의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원에 들어가고 나서 정부에서 교통비와 식비 명분으로 30만원의 경비를 지원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당장 교통비나 식비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내향적인 탓에 낯선 사람과 어울리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도 한 팀이 식사를 끼워주면서 어떻게 해결이 됐다.


이후에는 열심히 수업을 따라갔다. 이곳의 강사들은 잘 가르쳤기 때문에 진도를 나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책 편집 프로그램인 인디자인을 배우고 싶었지만, 강사는 어차피 인디자인은 포토샵, 일러스트를 배우면 금방 익힌다며 포토샵, 일러스트 위주로 가르쳤다. 그것들을 배워서 무엇에 쓰나 싶었다. 그래도 성실히 배웠고, 가르치는 대로 곧잘 따라갔다. 숙제도 잘해서 우등생으로 통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디자인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쓸 때도 나타나는 기질인데, 이미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것이 디자인을 할 때는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디자인을 하더라도 누군가가 만든 것은 감각이 있고, 내가 만든 것은 촌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차이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돌이키면 학원에서도 툴을 가르치기에 급급했지, 실제 실무에 적용되는 디자인의 디테일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많이 만들어 보고 익혀야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커리큘럼으로 소화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졸업 1개월을 남기고 인디자인을 배웠다. 책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렇지만 인디자인에 대한 기본 툴을 알려주고, 간단한 브로슈어 제작 실습을 했을 뿐 책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비로소 편집디자인이 무엇인지 안 것이었다. 요새는 책을 만들기 위한 편집디자인 정도는 유튜브나 온라인 강의를 조금만 보고 따라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을 배운답시고 엄한 시간을 버린 셈이었다.


졸업 기간이 얼마 남지 않자 학원에서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라고 독촉했다. 나는 어떤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을 따라 얼렁뚱땅 만들었다. 그 후 졸업을 하고 학원에서 소개해 준 중소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면접을 봤지만,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사했다. 그 후에 편집자 교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들어가면 출판사에 들어가기는 쉽지만, 소문으로는 엘리트들이 몰리는 코스라고 들었다. 정보를 더 찾기 위해 편집자들이 있는 커뮤니티를 찾아봤는데 편집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다는 글이 많았다. 월급이 낮은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야근도 많고 정년이 빠르다는 이야기에 의욕이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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