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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Oct 21. 2024

두 사람의 유언

글을 쓴다면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시 나오는 소설의 경향을 훑어봐도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바람이 출판계에 불기 시작하면서 문학계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탐색하는 소설이 주목을 받는다. 내 경우에는 그 소설들을 읽고 공감하기도 하고, 연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러한 고민은 나중의 문제이기는 했다. 당장 일을 관두고 나서 방에 돌아와서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바이럴마케팅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블로그를 키우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때는 파워블로거의 갑질이나 바이럴마케팅 회사의 난립으로 인해 네이버에 대한 신뢰도는 진즉 떨어졌고, 다른 SNS로 인해 이용량도 줄어들고 있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영상이나 짧은 글보다는 긴 글을 선호했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이 블로그였다. 실제로 문단에 데뷔한 젊은 작가 중에는 블로그를 운영했던 작가도 몇몇 있다.


막상 블로그를 키우려고 했지만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는 파워블로거, 요즘에는 인플루언서라고 하는 사람들은 소비할수록 성장하는 구조였다. 여행이나 맛집 등 하나의 키워드를 잡고, 그것을 중심으로 꾸준히 글을 써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 후 그것을 바탕으로 광고를 받거나, 책을 낸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을뿐더러, 일하면서 모은 돈이 있기는 했지만 블로그를 운영하기 위해 투자를 할 만큼 과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문화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그것들이 전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저 블로그에 자신의 일상을 화려하게 전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택한 방식은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블로그 이웃으로 최대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교류도 하고, 내가 쓴 글을 보여주면 어떤 발전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류하는 이웃 중에는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작가는 아니지만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섭렵하면서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 이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굉장한 능력이라고 느꼈다.


그 중에는 특히 더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글을 읽으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이웃을 맺고 댓글로 교류를 했다. 그가 진단하기에 내가 책을 읽기는 하지만 고전은 읽지 않아서 그런 부분이 아쉽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 도서를 추천받았다. 그는 직접 스승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렇게 해서 블로그에 쓰는 글에 이따금 피드백을 달고는 했다. 그런 피드백은 대부분 혹독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그와 갈등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어떤 장르의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책을 열정적으로 읽는 사람들을 보니 평론에 관심이 갔다.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도 소설보다는 평론을 쓰는 게 더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독학을 하면서 평론을 쓸까 생각했다. 블로그 스승의 경우에도 평론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했다. 다만 기존의 평론은 대부분 형식적이기 때문에 남들이 써도 그만인 글을 쓸 필요는 없다고 했다. 좋은 글은 풍부한 지식과 긴 숙고 끝에 나온다. 그렇기에 조급해하지 말고 배우면서 갈고 닦으라는 조언을 받았다. 나 역시도 거기에 동의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당장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다. 그는 그런 나의 태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로 인해 쓴소리를 듣고 멀어졌다.


수개월이 지난 블로그에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블로그 스승의 애인이라고 밝힌 그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연락을 안 하게 된 후로 그의 블로그에도 소식이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근황이 궁금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소식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그가 이따금 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늦었지만 나에게도 소식을 전해준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장례식에 가지는 못했더라도 그가 있는 곳에 찾아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감히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전의 나는 글을 쓰면서 먹고 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포부가 없었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 대부분 고전을 어느 정도 섭렵한다. 나 역시 고전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미처 고전을 읽을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달라진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마움이 컸다.


그렇지만 그는 떠났다. 쓰고 싶은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더 이상 없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그를 애도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뜻을 따라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나중에는 내 생각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들은 후로 결심이 더 굳어졌다. 그 후로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양으로 다지면 연간 300권 정도였다.


책을 읽고 독학한 내용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연구자가 보기에는 너무 아마추어틱했고,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보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교육자를 자처해서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된 정치철학이나 사회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남은 사람은 아마추어 철학도나 의리로 남는 몇몇 이웃이었다.


지금 돌이키면 간단했다. 평론가가 되고 싶으면 국어국문학과에 가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등단에 도전하면 된다. 대학 바깥에서 그러한 과정을 걷고 싶다면 동인을 결성해서 스터디를 하면서 기고를 하거나, 대안 매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것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어설픈 성에서 홀로 성벽을 쌓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정석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내 방식이 옳다고 고집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하는 일을 따라다니며 돈벌이를 했다. 일은 최소한만 하고 돈을 아끼면서 생활했다.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면서 식비와 주거비를 아끼고, 도서관에 가기 위한 최소한의 교통비와 통신비를 제외하면 큰 지출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수년간 시간을 보내면서 사회도 많이 바뀌었다. 웹소설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했고, 문학에 대한 관심은 더 낮아졌다. 그래도 출판계는 고정적인 문학 독자를 데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영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들어가고 싶다 해도 들어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운이 좋아야 가능했을 것이고, 그러려면 대단한 운이 필요했을 것이다.


외삼촌의 죽음에 이어, 분기점마다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다. 애도는 여기서 멈춰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반성하기도 한다. 어쩌면 종교인이 신에게 의존하듯이, 나도 의존할 대상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지금 하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런 이야기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은 왜 내가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그렇게 혼자 곪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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