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3년차부터 외출을 했으니 은둔한 사람에 비해서 상태는 조금 더 나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 집과 도서관을 오갔고, 여유가 되면 일주일에 한 번 수원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을 나갔다. 고립 생활을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인연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인연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과 친해지게 된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가족 행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없다는 듯 행동했고, 나 역시 그렇게 대하는 게 편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척이 갑자기 나에게 와서는 힘든 게 있으면 얘기하라며, 도울 수 있으면 돕겠다고, 힘내라고 했다. 그때 순간 얼이 빠졌다. 당장 고립 생활을 한다고 해서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제안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그러니 가만히 입을 다무는 것으로 답했다.
무신경하게 내버려두면 그것은 그것대로 상처였다. 그렇지만 호의랍시고 한 마디 툭 던지는 게 나에게는 더 큰 파장을 주었다. 고립을 하는 동안에는 작은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계속 곱씹으면서 생각한다.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했을까,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져 있을까,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새벽에 그런 생각이 들면 이불을 얼굴 위까지 덮어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되뇌다 잠들었다.
힘들지 않다는 것도, 외롭지 않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괜찮다고 암시했다. 몸에서는 이따금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혼자 대충 밥을 챙겨 먹고, 운동도 하지 않다 보니 전반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매일 한 끼 이상 라면을 먹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몸에 난 두드러기를 벅벅 긁으며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두드러기가 나니 자신감이 더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부위에 두드러기가 났다. 그래서 독서모임에 나갈 때는 몸을 최대한 가렸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관문을 거쳐야 했다. 버스를 타고 수원역까지 간 다음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버스에 내려서 지하철로 가는 길은 늘 어색했다. 수원역은 유동 인구가 많아 길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이따금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했다. 이것이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히려 이게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겠다고 해서 이때의 기분을 기록하고는 했다.
수원역을 지나다닐 때면 늘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다녔다. 사이비 종교를 포교하는 사람이 이따금 포진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포교하는 사람도 내가 만만해 보였는지 매번 타깃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이라도 듣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려웠다.
무사히 지하철에 당도하면 그때부터는 안심이 된다. 모임이 있는 곳까지 지하철에서 몇 정거장 가지 않기 때문에 금방 있으면 도착한다. 이상하게도 독서모임 안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모임에 나가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아는 얼굴이 생기면서 두려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나면 집에 돌아와야 했는데 그때는 마음이 편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이 환승센터와 연결되어 있고, 얼마 걷지 않으면 정류장이어서 금방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가끔 운 좋게 의자에 앉으면 감상에 빠지고는 했다. 모임에 다니면서도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한편으로 친해진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싶었다. 관계를 이어갈 수 있어도 내 상황에서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느슨하게 관계를 이어가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속하는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