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들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건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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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내가 할 말이 확실히 있는 주제다! ㅎㅎㅎ
뮤지컬 대본 작가로 일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마감을 앞둔, 그러니까 대본 회의 하루 전날 밤이 저절로 떠오른다.
해가 뜨기 전까지 수정 대본을 모든 스탭들에게 단체 메일로 보내놔야 하기 때문에,
그 날은 그야말로 눈 한 번 못 붙이고, 긴긴 밤을 보내야 한다.
저녁 먹고 나면 제대로 앉아서 쓰기 시작해야지,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만,
막상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와도 정신이 산만해서 집중이 잘 안 된다.
그러면 또 9시가 뉴스가 끝나면, 혹은 깜깜한 밤이 되면 시작해야지, 하고 각오를 다지지만,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에 끌려다니다가, 결국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건 밤 11시는 다 되어서다.
물론 핑계는 있다.
내가 그냥 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다 머릿속으로 궁리를 하고 있는 거라고.
이렇게 쓸까, 저렇게 써볼까, 구성을 바꿔볼까, 장면 순서를 바꿔볼까, 다 생각 중인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감을 못 잡아서, 도통 어떻게 써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시작을 못 하는 거다.
아... 그것만큼 무서운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하지만 그래서 마감은 위대하다.
이제 현실적으로 해뜨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 확실하게 계산이 되기 시작하면,
쥐어 짜내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
이때쯤엔 좋은 대본을 쓰려는 게 아니라, 뭐든 가져가서 보일 대본을 써야 한다는 태도로 바뀐다.
나는 지금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작가로서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것일 뿐이다.
아니, 그것도 너무 멋진 말이다.
난 그냥 욕을 먹지 않기 위해,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저 뭐라도 가져가려고 할 뿐이다. (이게 정답!)
문제는 분량이 너무 많다는 거다.
고작 6-7시간 동안 고치기엔 2시간 분량의 뮤지컬 대본은 정말이지 너무 많다.
수정하는 거니까, 새로 쓰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수정해보면 금방 알 거다.
차라리 새로 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3초에 한 번씩 들테니까. ㅋㅋㅋㅋㅋ
초반에는 지난 번 회의 때 나왔던 피드백을 참고해서,
어떻게든 스탭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쪽으로 고쳐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스탭들의 의견은 죄다 중구난방이고,
그걸 따라가려다 보면 "그래서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는 비명이 절로 터져나온다.
실제로 새벽 4시쯤 되면, 창문 열고 늑대처럼 울부짖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아파트에 사니까, 옆방에서 가족들이 자고 있으니까, 차마 진짜로 소리를 못 지를 뿐이지,
실제로 창문 열고, "아악!!!!!!!!!!!!!!!!!!!!!!!!" 하고 무음으로 소릴 지른 적은 많다.
미치고 펄쩍 뛴다, 내지는 환장한다, 수준의 상태가 된다.
이쯤 되면 난 작가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광년이다.
그리고 마지막 2시간 동안은 이 광기로 그냥 밀어붙인다.
이젠 내가 내가 아니다.
이성 따위는 마비된 지 이미 오래다.
지금은 그저 뭐라도 써제껴서 분량을 채워야 한다.
이제 나는 실실 웃어가면서 글을 쓴다.
왜냐하면 쓰면서 말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내가 봐도 웃긴다.
입에서 '미쳤구만, 미쳤어.' 이 소리가 그냥 새어나온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멈출 수가 없다.
뭐라도 고친 티가 나게 하려면, 지난 번 회의 때랑 그대로 가져가면 안 되니까 계속 바꿔야 한다.
물론 그러다보면 소가 뒷걸음질 하다 뭐에 걸린 것처럼,
'좀 괜춘한데?' 싶은 아이디어나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운 좋게 얻어걸린 것일 뿐,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믿긴 어렵다.
그렇게 날이 밝고,
잠에서 깬 엄마가 눈을 비비며 방에 들어와, "밤 샌 거야?"하고 물으면,
이제 대본 수정은 끝이 난다.
난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얼굴을 한 채로,
눈을 부릅뜨고 수정 대본 파일을 첨부해 모두에게 메일을 보낸다.
그리곤 침대에 벌러덩 나자빠진다.
그저 '보냈다', 는 안도감 하나만 있을 뿐. 만족 따윈 없다.
그리곤 회의에서 온갖 욕을 먹을 상상을 하며... 기절한다.
세상 찝찝한 잠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밤을 고통 속에서 보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싶다.
내가 결국 번아웃 된 게 하나도 안 이상하다.
에구... 나 고생 많았네... 애 많이 썼어...
지금은 그냥 그때의 나를 궁디팡팡 해주고 싶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