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 - 도망가자
아티스트 : 선우정아
발매 : 2019.12.12
[Serenade] 앨범의 두 번째 트랙 곡
https://www.youtube.com/watch?v=0q6DR6EiPPo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해 줘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당연해 가자 손잡고
사랑해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내가 어디 있든 엄마가 찾아낼 거니까!
내 왼쪽 팔목에는 흉터처럼 보이는 넓은 점이 있다. 태어날 적부터 있었는데, 어렸을 때의 나는 이 점이 아주 신경이 쓰였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봤다. 이 점은 왜 있는 것이며 없앨 수는 없냐고. 그랬더니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세윤이가 없어졌을 때, 엄마가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세윤이를 찾아야 하잖아? 그럴 때 누가 세윤이인지 알려주려고 이 점이 있는 거야. 이 점이 있어야 엄마가 세윤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의 심각한 질문에 대한 아주 귀여우면서도 현명한 대답이다. 이 귀여운 대답 덕분에 어린 세윤이는 길을 잃어버려도, 사람 많은 곳에서 엄마를 놓쳐도, '내가 어디 있든 엄마가 찾아낼 거니까!'라는 믿음을 가지고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얌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인생에서의 길을 잠시 잃어버렸을 때에 '내가 어디 있든 엄마가 찾아낼 거니까!'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며 고단한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이때는 나름 어른이라고 코를 훌쩍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내색 없이 통화를 하지만... 역시 엄마는 엄마다. 목소리만 들어도 당신의 자식이 슬퍼해 하는지를, 우울해 하는지를 다 아시더라.
도망갈까?
'다 때려치울까? 아니야,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도 없는데... 갈 곳도 딱히 없잖아?'
음악을 갓 시작한 초반에 수도 없이 들었던 생각이다.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도, 기초실력도 없어 하나하나씩 전부 배우고 연습하고 있는 와중에 직장생활과 병행까지 해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회사 업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레슨과 연습에 쏟았고, 그로 인해 코피도 꽤나 쏟았던 것 같다. 게다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나의 뇌와 성대와 손가락은 그들의 주인인 나를 속상하게 했다.
'도망갈까?'라는 문득 떠오르는 물음에, '도망가면 안 된다'라는 냉정한 대답을 하기 위해 일부러 동기부여 글귀나 영상을 찾아보며 몸도 맘도 지쳐있는 나를 계속 채찍질하고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그 당시의 나에게 "도망"이란 부정적인 단어였다.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 쉽고 빠르게 선택할 수 있는 회피 수단으로만 여겼다.
그렇게 도망가면 절대 안 된다며 현재 느끼는 고단함을 미련스럽게도 뿌듯하게만 여기던 어느 날. 그렇게 음악을 위해 포기한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도 모르게 나를 서서히 짓눌러가던 어느 날. 나의 나침반인 엄마에게 물었다. 도망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슬럼프가 찾아오면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것이 좋은지.
힘들 때는 도망가도 돼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있는 힘껏 도망가는 것". 힘들고 우울한 마음에서 헤어 나오려고 애써 노력하지 말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붙들고 어떻게든 일상을 열심히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휙 떠나보라고 하셨다. 훌쩍 일상을 떠나 불청객처럼 찾아온 슬럼프라는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저 푹 몸을 담가 보라고. 그렇게 "도망"을 한참 하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분명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때가 온다고.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휴식도 용납하지 않던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힘들 때는 도망가도 돼"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도망가면 안 돼"라는 말보다 더 단단한 힘을 주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도 되는데, 잠시만 이 바쁜 하루하루에서 벗어나도 뭐라 할 사람이 전혀 없는데, 왜 나는 고단함에 짓눌려 코피를 쏟고 조급함에 휩싸여 악몽을 꾸면서도 짧은 도망마저 허용치 않았던 걸까.
단단한 나뭇가지가 오히려 쉽게 부러진다는 것을, 절대 도망가지 않는 사람보다 잠시 도망갔다가 씩씩하게 돌아오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십 대의 끄트머리에 와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도망가자".
어쩌면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 어떤 말보다 이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돌아오자 씩씩하게
올해 3월, 나의 첫 미니앨범 [나의 세상]이 발매될 예정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월이다.)
총 세 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23년 11월부터 작업에 들어갔으니 장장 1년 4개월 정도의 제작 기간이 들었다. 세 곡 전부 작곡·작사·편곡을 직접 진행하면서 제작 기간도 길어졌고 머리도 많이 싸맸지만, 이번 앨범 제작에 들어갈 때 혼자 다짐한 룰 덕분에 힘든 레이스를 비록 느린 속도지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그 룰은 바로 "작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아등바등 붙잡지 말고 도망가기"였다.
악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가사가 잘 써지지 않을 때면, 편곡 아이디어가 막힐 때면 '내일의 나'를 믿으며 '오늘의 나'는 미련 없이 짧은 도망을 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잘 풀리지 않던 작업이 다음 날에는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짧은 도망과 돌아옴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에는 조급함 없이 내가 담고 싶은 메시지를 전부 담아낼 수 있었다. 도망의 점철로 인해 지겨우리만큼 길어진 작업 기간은 나와 내 인생과 내 주위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보게 해 주었고 그에 대한 감상을 멜로디로, 가사로, 악기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의 이 느린 달리기를 통해 긴 레이스를 힘겹게 완주해 내고 깨달은 것이 있다. 도망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도망은 우리에게 때때로 필요하다는 것.
열심히 살다가 힘든 순간이 오면 까짓것, 짧게라도 도망가보자. 그리고 선우정아의 노래처럼 실컷 웃고 마음껏 울다가 씩씩하게 돌아오면 된다. 우리의 "도망"은 중단을 위한 편도가 아닌, 도약을 위한 왕복이기에.